안그라픽스

글짜씨 26: 지금까지의 타이포그래피

LetterSeed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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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탐험가가 되기 위한

지금까지의 타이포그래피 탐구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는 글자와 타이포그래피를 연구하기 위해 2008년 창립되었다. 『글짜씨』는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에서 2009년부터 발간한 타이포그래피 학술지로, 제8대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와 시작한 이번 26호의 주제는 ‘지금까지의 타이포그래피’이다. 갈수록 빠르고 복잡하게 전환을 거듭하는 디지털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연표와 응답, 인터뷰 등으로 구성된 특집을 통해 기술과 타이포그래피가 결을 함께하며 변화하고 발전해 온 맥락을 집중적으로 짚어본다. 이 책은 디지털의 시작부터 오늘날까지의 흐름을 탐색해 앞으로의 타이포그래피를 가늠하고, 모든 것이 가속하는 세상의 자유로운 ‘탐험가’를 위한 안내서가 되고자 한다.

편집자의 글

어제와 오늘의 실천을 톺아보며

내일의 타이포그래피를 가늠한다

여는 글에 해당하는 심우진의 글 「Lifography; 디지털 시대의 타이포그래피」은 결론에서 출발해 서론이 이어지고 본론으로 맺는다. 디지털 타이포그래피가 요하는 삶과 이야기의 맞물림을 위해 “생각과 행동의 단위를 잘게 쪼개고, 내 몸으로 감각하고 경험하며, 대화하는(말하고-듣고-쓰고-읽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다음 서론에서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의 방향성을 향한 질문에 답하고 앞으로의 타이포그래피를 가늠하고자 함을 밝힌다. 그리고 본론은 디지털과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학회의 정체를 물으며 시작한다. 낱말을 정의하는 일은 나와 일상, 즉 삶과의 ‘연결 상태를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유지·보수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질문에 답하면 연결된 것이고 못하면 끊긴 것이다. 꾸준히 묻고 답해야 신선할 수 있다.” 글은 학술적 관점에서 과학, 예술, 기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키워드를 제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며 디지털 타이포그래피의 맥락을 연결하다가 말미에 이르러 라이프스타일과 타이포그래피를 더한 ‘라이포그래피(Lifography)’에 다다른다. 비록 디지털이 말과 글의 전환을 가속하고 기술 또한 빠르게 바뀌는 시대지만 ‘탐험가에게는 아름다운 세상’이기에, 탐험가가 되는 것은 앞선 결론의 질문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의 해석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특집은 박유선과 유도원이 「기획의 글」에서 알린 바와 같이 디지털 타이포그래피의 정체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시도다. 먼저 「디지털 타이포그래피 연표 1.0」는 디지털과 타이포그래피의 중첩 지점을 탐색한다. 1990년대 초반부터 디지털 전환기, 그리고 현재까지 국내를 중심으로 타이포그래피 및 기술의 변화와 관련된 사건을 수집하고, 이와 연결된 국외의 큰 사건을 수집했다. 연표의 작성은 의견 수렴과 자문 등의 참여형 제작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타임라인은 지금도 확장 중이다. 이어지는 「응답」은 강유선, 구모아, 길형진, 석재원, 위예진, 최규호, 한동훈, 홍원태가 연표에 나열된 몇몇 사건에 상세한 경험이나 의견으로 이야기를 더한다. 「인터뷰」에서는 안상수, 조의환, 김신, 유정미, 김현미, 홍동원, 정석원, 안병학, 권경석, 박용락, 최명환까지 디지털 전환기를 직접 마주하며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다. 그들이 활동을 시작했을 때의 도구와 매체, 전환기의 어려움과 극복법, 그 이후의 제작 환경, 현재의 디자이너 세대를 위한 조언 등의 공통 설문을 제시하고 사이사이에 개별적인 심화 질문을 던져 더 깊이 개개인의 경험에 파고들었다. “무엇보다도 디지털 환경에서의 타이포그래피를 둘러싼 현상의 면면과 그 변화에 대응한 주체자와 실천에 주목했다.”

기고를 쓴 강현주는 「낯설었지만 익숙해진 풍경에 대한 기억, 타자기에서 생성형 AI까지」에서 근래 ‘Y2K’로 통칭해 호명하는 지난 세기말 시기에 쓴 두 편의 글을 재록하고, 그가 40년간 디자인계에 몸담으며 직접 겪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기를 풀어낸 뒤 디지털이 고도화하며 생성형 AI를 향한 기대와 우려가 혼재하는 오늘날을 겹쳐본다. 교육자로서 이런 전환기에 디자인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에 대한 고민, 그리고 성찰을 엿볼 수 있다. 이민규는 「공백을 들여다보기: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의 기획과 실천」에서 “영웅적 개인과 기념비적 작업”으로 구성된 한국 디자인사 바깥에서 가시화되지 못한 디자인사(들)를 발견하고 기록하고자 한다.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는 이런 시도와 실천 끝에 나온 책으로, 지역 그래픽 디자인 생산 현장에 있던 여성 직업인 이영희를 비롯해 가장 보편적인 얼굴과 목소리를 담아냈다. 마지막으로 심우진이 「날개 안상수 개인전 《홀려라》 이야기」에서 전시 감상과 함께 전시장에서의 경험을 공유한다. 《홀려라》는 안상수가 작품을 통해 세계관을 선보이는 자리를 넘어, 전시장 사랑방에서 즉석으로 뚝딱 만들어낸 ‘마당’에 모인 사람 간의 대화와 관계를 연결하며 “그가 평생 벌여온 퍼포먼스의 연장” 그 자체가 되었다.

논고는 두 편이 게재되었다. 김태룡의 「한글 조판에서 「홑낫표」와 『겹낫표』의 너비 설정에 대한 고찰」은 문득 ‘낫표’를 ‘따옴표’처럼 디자인해 왔음을 깨달은 연구자가 이것이 적합한 디자인 방법인지 의구심을 품는 데서 출발했다. 연구는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구조적으로 살펴본 후, 이를 바탕으로 본문용 한글 조판에 어울리는 낫표의 너비 설정 방법을 제안한다. 민본은 「표지 글자와 활자의 기능 비교 및 상호작용 고찰」에서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활자(type)와 ‘표지(sign) 글자’ 사이의 경계가 점차 흐려지는 경향을 지적하는데, 지난날 이미 둘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활자 개발의 사례 세 가지를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적용할 만한 요소를 파악한다. 이런 과정은 활자와 표지 글자의 균형을 찾으며 디지털 시대의 활자 개발에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책 속에서

빠르게 바뀌는 디지털 타이포그래피의 선두(끝점)에게는 의지할 반대편 끝점이 필요하다. ‘불안한 눈빛으로 되돌아보기’는 꾸준히 도약하는 디지털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양 끝을 비교하면 매우 다르지만 그래봤자 한 몸통의 양 끝일 뿐이다. 여전히 바우하우스, 에밀 루더를 찾는 이유는 디지털의 반대편 끄트머리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변치 않는 것의 나머지다. 이른바 ‘양 끝의 역설’이다.

심우진, 「Lifography; 디지털 시대의 타이포그래피」, 22쪽

지금은 오히려 ‘백 투 더 퓨처’ 같은 느낌이 들어요. 우리 교육은 일본이나 서양의 것을 배우는 데 치중했죠.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선 것 같아요. 일본이나 서양의 한계도 보이고, 우리만의 자신감도 생겨났어요. 활을 쏘려면 뒤로 많이 당겨야 앞으로 나갈 수 있듯이, 우리 문화와 전통을 되돌아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잖아요. 서양의 라틴어 문화권처럼 한자와 한글이라는 자산이 있어요. 고전 문헌이나 한글의 철학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발전시켜야 해요.

「인터뷰 - 안상수」, 57쪽

우리나라에서 한자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요. 학술적 용도나 공식 문서에서는 여전히 한자를 사용해야 하죠. 하지만 한자를 보는 시각은 다양해요. 어떤 사람들은 한자를 쓰면 애국심이 없다 취급하고, 한글만 써야 애국자라고 생각하기도 하죠. 많은 사람이 한글과 우리말을 구분하지 못해요. 이런 환경에서 폰트를 개발하는 사람은 완전한 폰트를 만드는 게 중요해요. 대부분 한글만 잘 만들면 훌륭한 폰트라고 생각하지만, 한자까지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모든 문자를 완벽하게 포함한 활자를 만들어야 해요. 나아가 국가 차원에서 표준화 작업이 필요해요. 누군가는 완성도 높은 한 벌의 활자를 만드는 시도를 해야 하고, 그것이 개인이든 국가든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터뷰 - 조의환」, 74쪽

저는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줄 미래를 전혀 장밋빛으로 낙관하지 않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수많은 물리적 테크닉, 즉 사람이 손으로 했던 테크닉을 무용지물로 만듭니다. 그뿐 아니라 작업을 하면서 느꼈던 공동체 감각마저 해체합니다. 내비게이션이 등장하자 전국의 길을 외우던 운전자의 능력이 사라진 것처럼, 디지털 기술로 인해 디자이너가 스스로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었던 다양한 창의적 발상을 컴퓨터 없이는 해내지 못하게 된 결과를 만들어낸 건 아닐까요?

「인터뷰 - 김신」, 81쪽

얼마 전에 생성형 AI 시연회에 참석했습니다. 현재 디자이너 세대는 이미 디지털 세례를 받았으니 35년 전에 제가 DTP 시연회에서 느낀 ‘공포감’과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들도 비슷한 충격을 받을 거 같아요. 기술이 먼저인지 사람이 먼저인지 묻는다면 저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겠습니다. ‘창의성’은 기술이 가로챌 수 없는 사람만이 지닌 사유의 영역에서 나오니까요. 창의적인 사고를 유지한다면 어떤 새로운 기술이 와도 대체될 수 없다고 봐요. 생각을 깊이 하고 사유하는 디자이너로 남았으면 합니다.

「인터뷰 - 유정미」, 87–88쪽

시각 디자인 제작 방식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할 때 공부한 사람으로서, 아날로그 방식의 손과 눈 훈련이 매우 유효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특히 글자를 직접 손으로 그려보고 자간, 단어 간, 행간 등의 마이크로 공간을 고민하면서 훈련한 경험, 실재하는 2D 평면에 여러 시각 요소를 배치해 보면서 요소 사이에 생기는 상호 관계와 다양한 시각 구성의 가능성을 익힌 레이아웃 경험 등은 견고한 기본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인터뷰 - 김현미」, 91쪽

디자이너들끼리만 모여서 발전하는 게 아니라 관련 인력이 함께 모여야 해요. IT가 조선일보에서 육성되었던 것처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일해야 발전할 수 있어요. 협회나 학회에서도 디자이너, 에디터, 엔지니어가 모여야 해요. 학회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일해야 발전할 수 있어요. 저는 운 좋게 IT와 디자인이 결합되는 시기에 있었어요. 에너지 있는 파워풀한 몸을 만들어내려면 협업해야 해요. 디자이너들끼리만 작업하면 결국 엔지니어나 에디터 측면의 얘기는 모르잖아요. 좁은 시선만 가지고 계속 얘기하게 되는 거죠.

「인터뷰 - 홍동원」, 100쪽

현재 디자이너 세대가 겪는 가상공간, AI 같은 새로운 매체 및 기술 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매체가 도구화하면서 거꾸로 디자이너의 역할을 전면 재규정할 겁니다. 디자이너는 도구와 매체 변화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내 것으로 만들어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체와 도구가 감각과 디자인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는 이치입니다. 새로운 매체와 도구를 주저하지 말고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기 바랍니다.

「인터뷰 - 안병학」, 114쪽

예전이나 지금이나 디지털 기술 전환기에 디자인을 공부하고 가르치다 보면 조급한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뉴미디어가 도래한다고 올드미디어가 모두 일시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또 모든 디자이너가 첨단 테크놀로지 관련 작업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디지털 기술이 열어주는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지만,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빠져 자신의 관심사와 취향, 타고난 소양과 기질을 쉽게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강현주, 「낯설었지만 익숙해진 풍경에 대한 기억, 타자기에서 생성형 AI까지」, 134쪽

소수의 영웅적인 개인과 몇몇 기념비적 작업으로 구성된 한국 디자인사의 얼굴을 상상해 보자. 서울의 주요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자본과 권력을 가진 기업을 위해 일하거나, 작가주의적 태도로 작업을 생산하며 단독자로서의 예술가이자 문화 생산자로 호명되는 중장년 남성 디자이너의 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한국 디자인사에는 수많은 협업자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디자인 현장과 그 속에서 묵묵히 일해온 이름 없는 자들의 이야기가 누락되어 있다.

이민규, 「공백을 들여다보기: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의 기획과 실천」, 139쪽

차례

Lifography; 디지털 시대의 타이포그래피 | 심우진

특집
기획의 글 | 박유선, 유도원
디지털 타이포그래피 연표 1.0 | 박유선, 유도원
응답 | 강유선, 구모아, 길형진, 석재원, 위예진, 최규호, 한동훈, 홍원태
인터뷰
— 안상수, 조의환, 김신, 유정미, 김현미, 홍동원, 정석원, 안병학, 권경석, 박용락, 최명환

기고
낯설었지만 익숙해진 풍경에 대한 기억, 타자기에서 생성형 AI까지 | 강현주
공백을 들여다보기: 『이영희는 말할 수 있는가?』의 기획과 실천 | 이민규
날개 안상수 개인전 《홀려라》 이야기 | 심우진

논고
한글 조판에서 「홑낫표」와 『겹낫표』의 너비 설정에 대한 고찰 | 김태룡
표지 글자와 활자의 기능 비교 및 상호작용 고찰 | 민본

지난호 오류 정정
참여자
논문 규정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글자와 타이포그래피를 바탕으로 소박하며 진솔한 입장에서 깊은 생각을 나누고 이를 통해 한국의 시각문화 성장이라는 바람을 이루기 위해 2008년 9월 17일 사단법인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국내외 회원의 연구와 교류 그리고 협력을 통해 매년 정기적으로 좌담회 및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작품을 전시하며, 학술논문집 『글짜씨』를 발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우수한 타이포그래피 문화 확산에 힘쓰고 있다.
은 안그라픽스에서 발행하는 웹진입니다. 사람과 대화를 통해 들여다본
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