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다양한 개인들과 더 포용하는 사회를 위하여
디자이너가 실천하는 퀴어 운동
디자이너가 소수자를 지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소수자 관련 행사의 아이덴티티와 포스터를 디자인하거나 소수자 관련 책을 디자인하는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강연」의 저자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이 잘하는 일을 통해 소수자를 향한 영원한 지지를 드러낸다. 민디 서는 온라인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페미니즘 관련 자료들을 아카이빙하고 정렬해 인덱스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사이버페미니즘’을 구현한다. 폴 술러리스는 오랜 시간 퀴어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지켜온 인물들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인공지능 미드저니 봇에 그동안 시대적, 사회적 차별로 인해 보기 어려웠던 퀴어, 트랜스젠더의 이미지를 요청함으로써 자기만의 퀴어 아카이브를 형성한다.
앤시아 블랙은 대학에서 교수가 퀴어 학생과 트랜스젠더 학생을 지원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담은 실용서 『핸드북』과 그 제작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것을 강조한다. 『핸드북』은 나아가 퀴어 교수진과 트랜스젠더 교수진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로빈 쿡은 팰머스대학과 요하네스버그대학이 협업해 진행한 가상 타임라인 프로젝트 〈불평등한 이야기들〉(2021-2022)을 소개한다. 이 프로젝트는 “만약…? 만약 세계가 계속해서 전통적인 패러다임을 통해 디자인된다면?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디자인 산업 내 젠더 불평등을 드러낸다. 이렇듯 소수자를 향한 지지를 표출하는 방법은 무한하고 각자의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디자인하는 모든 실천이 퀴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도 아닌 우리의 새로운 계절
세계관은 더 이상 영화나 책에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자기 취향의 세계관을 선택함은 물론, 자기만의 세계관을 직접 구축하는 사람들도 많으며 잘 조직된 세계관은 훌륭한 마케팅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 세계관에 웃고 울고 ‘팔로우’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지지하고 구매하고 인증하고 연대를 확인한다. 이런 식으로 확인하는 공감은 반경이 좁을수록 온도가 뜨겁다.” 그리고 여기 「워크숍」에 퀴어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세계관이 한데 모였다. 이들의 세계관은 취향도 선택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됐으므로 가상이 아닌 더할 나위 없는 현실이자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퀴어한 개인들이 모여 퀴어한 삶을 경청했고, 그렇게 공유한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김헵시바, 배성우, 이경민은 각자를 표상하는 이모지를 서로 섞어짜기 함으로써 세상에 없던 이모지를 탄생시키며 범주화에 도전한다. 비어트릭스 팡은 “본인이 퀴어라면 잡지 만들기는 자신을 위한 투쟁 과정”이기 때문에, 기존 책자 형태에서 벗어나 컵라면의 컵을 진(zine)으로 만드는 워크숍을 진행한다. 굿퀘스천의 신선아와 우유니는 사회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난 존재들에 관한 참가자들의 솔직한 경험을 진에 녹여내도록 한다. 진은 비주류 및 하위문화에서 시작한 표현 매체인 만큼 다분히 퀴어한 매체다. 가타미 요와 이재영은 외로움에 관한 대화를 진으로 담아내는 워크숍을 진행한다. 그동안 마음속에 꾹꾹 숨겨온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는 일은 “풍경을 만드는 일이자 외로움의 경계를 흐리고 우정의 이미지를 찾아가는 일”이다.
이 모든 워크숍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서로의 비밀스럽고 소중한 이야기를 온몸으로 듣는 것. 모든 이모지와 컵라면의 컵과 진은 서로의 경험을 귀담아듣는 데서 출발했다. 쉽게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내보이면서 참가자들은 공기처럼 흐르는 연대를 확인했다.
백인 시스젠더 남성과 유럽‧미국 중심의 디자인 담론을 탈피하다
「기획」에서 엘리자베스 레즈닉은 캐넌의 정의를 살펴보며 디자인 세계는 그동안 남성의 세계였음을 지적한다. 그동안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는 기존의 캐넌에 따라 불합리적으로 배제당했으며 이제 그들의 업적을 빠짐없이 기록해야만 한다. “젊은 소녀들은 그들이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롤 모델을 참고할 필요가 있”고,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존재를 따라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라 아르샤드는 디자인 담론이 여전히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생성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디자인 분야의 탈중심화를 위해 구술사 방법론을 제시한다. 구술사 방법론은 살아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소외되고 잊힌 집단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한국의 퀴어 출판물, 없던 것이 아니라 나와 연결되지 않은 것
「수집」에서 이승주는 퀴어, 젠더, 페미니즘, 소수자, 노동, 지역 등을 주제로 한 책들을 선정해 온라인 서점에서 같은 저자, 같은 역자, 같은 출판사, 같은 시리즈 등 친연성을 띠는 링크를 타고 넘어가며 유사한 범주의 도서 목록을 만든다. 모인 책들은 하나의 군집을 형성해 말하려는 바를 더욱 명징하게 드러낸다. 일종의 지도를 형성한 국내 퀴어 출판물들의 목록은 독자를 새로운 다양성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이경민은 석사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열린 전시 《한국의 퀴어 연속간행물 아카이브 확장하기》(2022-2023)를 자세히 설명한다. 논문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덧붙이며 국내 퀴어 연속 간행물의 역사와 현황을 살핀다. 그가 한국 퀴어 아카이브 ‘퀴어락’과 조우한 경험은 국내에 퀴어 연속 간행물이 없었던 게 아니라 사실은 우리와 연결되지 않았던 것뿐임을 알려준다. 한국의 퀴어 출판물은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강렬하고 절박한 의지가 지켜온 산물인 것이다.
퀴어한 북 디자인, 퀴어한 종이, 퀴어한 글자체
북 디자인, 종이, 글자체가 퀴어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퀴어를 다룬 책은 많아도 이 세 가지가 퀴어하다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비평」에서 기디언 콩, 정아람, 임혜은은 가장자리로 내몰리고 소외된 존재들을 드러내는 데 북 디자인, 종이, 글자체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용하는지, 그래서 이 관계가 얼마나 퀴어한지 비평한다.
기디언 콩은 『방법으로서의 출판』(미디어버스, 2023)의 디자인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이 책의 북 디자인이 아시아 곳곳의 소규모 출판과 다양한 출판 실천의 관계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비평한다. 그의 말마따나 “디자인은 책의 내용과 분리되거나 독립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아람은 전시 《구현된 출판》(2023)의 각 파트에서 종이가 인간, 기계, 기술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되며 규범성을 벗어던진 사례들을 분석한다. 종이는 꼭 우리가 알고 있는 책 형태를 이루지 않아도 된다. 여러 장의 낱장, 오려진 아코디언 형태의 긴 종이, 한 장짜리 전단지여도 좋다. 그 자체로 책이 될 수 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교섭하는 몸”이 된다. 임혜은은 글자체 「길벗체」의 요소들을 세밀하게 살펴보며 소수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확인하고, 이 또한 훌륭한 운동 중 하나라고 말한다. 「길벗체」는 성적 소수자 활동가이자 자긍심의 무지개를 고안한 길버트 베이커를 기리며 만들어진 영문 글자체 「길버트체」의 한글판 글자체다. 최초로 전면 색상을 적용한 완성형 한글 글자체이며, 길버트 베이커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와 함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향한 길을 함께한다는 ‘벗’의 의미도 담고 있다.
민부리 한글로 세로쓰기를 한다면?
같은 듯 다른 필서체와 인서체
「논고」에서 김태룡과 석재원은 한글에 민부리 글자체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 사이로, 한글의 쓰기 방향이 가로로 전환되던 시기임을 밝힌다. 따라서 만약 민부리 글자체가 가로쓰기가 아닌 세로쓰기 환경에서 발달했으면 어땠을지 탐구하며 글자체 「산유화」 개발 과정에서 확장된 관점을 소개한다. 이용제는 한글이 필서체에서 인서체로 분화, 진화하는 과정 중에 나타난 과도기적 구조 공간 표현법을 분석한다. 또한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며 고전적인 필서체나 인서체 개념으로 논의하기 어려운 다양한 글자체가 개발되고 있어, 이를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피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