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에 대한 54개의 법령과 30개의 시도
법의 변화 과정으로 보는 사회가 장애인을 차별해 온 방식
모든 시위와 운동은 궁극적으로 법제의 변화를 추구한다. 불합리한 정책뿐 아니라 그토록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회적 시선도 결국 법제라는 기반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예진 디자이너의 말을 빌리자면 “나아가 사회적 인식과 현행 법령은 밀접한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해 나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무언가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운동을 펼칠 때는 그 무언가를 둘러싼 법제의 역사를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단순하게 개정안을 달달 외는 일이 아니라, 그 무언가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이해’하는 일 말이다.
조예진은 이런 앎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장애인의 문화예술 향유 및 창작과 관련한 법제 발전 과정을 정리하며 장애에 대한 시선과 장애인의 권리가 변화해 온 과정을 풀어낸다. “신체적, 정신적 손상으로 치료 불가능한 대상”, 즉 병리학적 관점으로 장애를 인식한 1960-1970년대부터 “사회가 구축해 놓은 환경, 조건, 인프라가 장애인을 억압하는 사회적 환경이 문제”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의 사회적 관점까지, 장애와 관련한 54개 법령의 흐름을 명료하게 꿰뚫는다. 또한, 이 법령들과 연관 있는 주요 배리어프리 사례 30개를 소개해, 자칫 어렵게만 느낄 수 있는 법령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장애인 예술가, 장애 이동권 협동조합원, 음성 해설가,
점자책 기획자, 접근성 매니저, 쉬운 정보 제작자⋯
‘당사자성의 확보’를 위해 모인 전문가 29명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마음
장애, 접근성, 포용성, 쉬운 정보⋯. 특히 장애인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 테이블 위에 이런 주제가 오른다면 테이블을 둘러앉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장애인이 좀 더 용이하게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도록 백방으로 힘쓰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나 확실한 것은, 장애 당사자를 포함하고, 관련 직군이 다양하면 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문화예술 기획에서 접근성을 확보하는 일은 결코 혼자서 해낼 수 없다. 반드시 여러 전문가의 개입과 협력이 필요하다. 개중에는 당연히 장애 당사자의 목소리도 있다. 그래서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는 이번 『글짜씨』 25호에서 역대 『글짜씨』 중 가장 많은 전문가를 모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29명의 전문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마음’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내 주위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시작하게 된” 일이자 “불가능하지만 점차적으로 해보는” 일이다. 촉각 명화, 음성 해설 등 기존 ‘배리어프리’ 전시의 한계를 분명히 지적하는 김시락 전맹 예술가, 점자를 잘 몰라도 점자 규정을 지키면서 제작할 수 있는 ‘점킷’을 기획한 노유리 매니저, 복잡한 서울 지하철에서 교통 약자가 조금이라도 더 쉽게 환승하고 이동할 수 있도록 〈서울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를 제작한 협동조합 무의, 타이포잔치 2023을 뇌병변 중증장애인의 관점에서 꾸밈없이 비평한 김환 예술가, 「접근성 작업자를 위한 키워드 사전」을 소개하는 이충현 접근성 매니저 등 이들은 장벽 한 겹을 부수기 위해 수백수천 겹의 장벽에 기꺼이 부딪힌다. 몇몇은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여기지는 않는다고 고백하기도 하지만 이들을 진정한 ‘전문’가로 만드는 것은 ‘할 수 있는 건 다 실천해 보는 태도’이므로, 이들 29명은 진정한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 되도록
‘장애인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란 말은 기본적으로 문화예술을 누리는 권리란 모두의 권리가 아니며 특정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권리라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김형재 학술출판이사의 말에 따르면 “보편성과 포용성은 불평등에 결부되는 결핍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기본권을 추구해야 한다는 절실함보다는 한계효용을 균등화하려는 합리적인 태도와 연결”된다. 그래서 『글짜씨』 25호는 이러한 오랜 관행을 수면 위로 꺼내어 말문을 열어보고자 ‘접근성과 타이포그래피’를 주제로 삼았다.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건축, 미술, 공연 예술 등과 비교해 접근성과 관련한 의식 수준이 높은지, 구체적 실천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알고도 외면하는 자신을 정당화하진 않는지 되돌아본다. 이 성찰의 목표는 자책이 아니다. 그동안 배리어프리한 문화예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력을 기울였고, 앞으로 할 일은 얼마나 많이 남았고, 또 여기서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 디자인은 무얼 할 수 있는지 탐구하고 논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