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그라픽스

글짜씨 25: 접근성과 타이포그래피

온라인 판매처

모두를 위한 예술, 배제하지 않는 디자인
시각예술 이상의 타이포그래피를 꿈꾸다

타이포그래피는 시각예술이다. 타이포그래피를 표현하는 매체, 글자체의 인상과 그 속에 깃든 정신, 가독성과 판독성, 이 모든 것은 시각으로 목격할 수 있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전맹 시각장애인은 타이포그래피를 즐길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는 이 질문에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며, 『글짜씨』 25호를 통해 타이포그래피를 비롯한 (시각)예술의 접근성을 높이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국내 장애인 관련 법제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한 연표에서 시작해 차별과 불평등을 실감한 장애 당사자들의 꾸밈없는 이야기는 물론, 장애인을 비롯한 정보 취약 계층이 예술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작업자들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담고 현업 디자이너가 배리어프리(barrier-free) 디자인을 실천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또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2022년 작과 2023년 작을 심사평과 함께 실어 지난 2년간 한국에서 추구된 아름다움을 개괄했다.

특히 이번 25호는 접근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공명하는 목소리들을 잘 담아내기 위해 이전 호보다 많은 필진을 모았다. 그중에는 접근성 관련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뿐 아니라 접근성 매니저, 음성 해설 작가, 장애인 예술가, 점자책 기획자, 장애 인식 개선 강사, 쉬운 정보 제작자, 장애 이동권 협동조합원, 미술관 큐레이터 등 접근성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그간 너무도 당연하게 시각예술의 범주에 속해온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 디자인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해방시켜,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간다. 당장 해결책은 없을지라도, 이들은 장애와 비장애를 가로막는 장벽(barrier)의 밑동을 조금조금씩 파낼 뿐이다.

편집자의 글

장애인에 대한 54개의 법령과 30개의 시도
법의 변화 과정으로 보는 사회가 장애인을 차별해 온 방식

모든 시위와 운동은 궁극적으로 법제의 변화를 추구한다. 불합리한 정책뿐 아니라 그토록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회적 시선도 결국 법제라는 기반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예진 디자이너의 말을 빌리자면 “나아가 사회적 인식과 현행 법령은 밀접한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해 나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무언가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운동을 펼칠 때는 그 무언가를 둘러싼 법제의 역사를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단순하게 개정안을 달달 외는 일이 아니라, 그 무언가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이해’하는 일 말이다.

조예진은 이런 앎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장애인의 문화예술 향유 및 창작과 관련한 법제 발전 과정을 정리하며 장애에 대한 시선과 장애인의 권리가 변화해 온 과정을 풀어낸다. “신체적, 정신적 손상으로 치료 불가능한 대상”, 즉 병리학적 관점으로 장애를 인식한 1960-1970년대부터 “사회가 구축해 놓은 환경, 조건, 인프라가 장애인을 억압하는 사회적 환경이 문제”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의 사회적 관점까지, 장애와 관련한 54개 법령의 흐름을 명료하게 꿰뚫는다. 또한, 이 법령들과 연관 있는 주요 배리어프리 사례 30개를 소개해, 자칫 어렵게만 느낄 수 있는 법령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장애인 예술가, 장애 이동권 협동조합원, 음성 해설가,
점자책 기획자, 접근성 매니저, 쉬운 정보 제작자⋯
‘당사자성의 확보’를 위해 모인 전문가 29명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마음

장애, 접근성, 포용성, 쉬운 정보⋯. 특히 장애인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 테이블 위에 이런 주제가 오른다면 테이블을 둘러앉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장애인이 좀 더 용이하게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도록 백방으로 힘쓰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나 확실한 것은, 장애 당사자를 포함하고, 관련 직군이 다양하면 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문화예술 기획에서 접근성을 확보하는 일은 결코 혼자서 해낼 수 없다. 반드시 여러 전문가의 개입과 협력이 필요하다. 개중에는 당연히 장애 당사자의 목소리도 있다. 그래서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는 이번 『글짜씨』 25호에서 역대 『글짜씨』 중 가장 많은 전문가를 모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29명의 전문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마음’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내 주위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시작하게 된” 일이자 “불가능하지만 점차적으로 해보는” 일이다. 촉각 명화, 음성 해설 등 기존 ‘배리어프리’ 전시의 한계를 분명히 지적하는 김시락 전맹 예술가, 점자를 잘 몰라도 점자 규정을 지키면서 제작할 수 있는 ‘점킷’을 기획한 노유리 매니저, 복잡한 서울 지하철에서 교통 약자가 조금이라도 더 쉽게 환승하고 이동할 수 있도록 〈서울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를 제작한 협동조합 무의, 타이포잔치 2023을 뇌병변 중증장애인의 관점에서 꾸밈없이 비평한 김환 예술가, 「접근성 작업자를 위한 키워드 사전」을 소개하는 이충현 접근성 매니저 등 이들은 장벽 한 겹을 부수기 위해 수백수천 겹의 장벽에 기꺼이 부딪힌다. 몇몇은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여기지는 않는다고 고백하기도 하지만 이들을 진정한 ‘전문’가로 만드는 것은 ‘할 수 있는 건 다 실천해 보는 태도’이므로, 이들 29명은 진정한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 되도록

‘장애인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란 말은 기본적으로 문화예술을 누리는 권리란 모두의 권리가 아니며 특정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권리라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김형재 학술출판이사의 말에 따르면 “보편성과 포용성은 불평등에 결부되는 결핍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기본권을 추구해야 한다는 절실함보다는 한계효용을 균등화하려는 합리적인 태도와 연결”된다. 그래서 『글짜씨』 25호는 이러한 오랜 관행을 수면 위로 꺼내어 말문을 열어보고자 ‘접근성과 타이포그래피’를 주제로 삼았다.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건축, 미술, 공연 예술 등과 비교해 접근성과 관련한 의식 수준이 높은지, 구체적 실천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알고도 외면하는 자신을 정당화하진 않는지 되돌아본다. 이 성찰의 목표는 자책이 아니다. 그동안 배리어프리한 문화예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력을 기울였고, 앞으로 할 일은 얼마나 많이 남았고, 또 여기서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 디자인은 무얼 할 수 있는지 탐구하고 논의하는 것이다.

책 속에서

배리어가 없는 완벽한 환경을 구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나의 행동이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이다.

「배리어프리 연표」, 15쪽

일반적으로 문턱을 없애는 것을 배리어프리(barrier-free)라고 부르지만, 눈에 보이는 배리어를 없엔 곳에도 여전히 배리어가 존재한다. 따라서 ‘배리어가 없다’ 혹은 ‘배리어를 없앤다’는 의미보다 ‘배리어를 인식하고 그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에 무게를 둔 표현을 뜻한다.

「배리어프리 연표」, 39쪽

… 디자인과 시각 미술 안에서 접근성이라는 것 자체를 개념화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 혹은 작가 자신이 접근성을 이해하고 있고 이렇게 색다르게 다룰 수 있음을 과시하는 식의 미학적 접근 사례들을 접한 적이 있고, 그런 시도들은 오히려 접근성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기에 불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운드 테이블」, 63쪽

… 어느 순간에는 접근성이라는 절대 기준이 존재하고 그 절대 기준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닐까 돌아보고 있습니다. … 배리어프리한 환경을 위해서 무조건 수어 통역과 문자 통역, 음성 해설이 있어야 한다는 절대적 규칙을 만드는 것을 저는 지양합니다. … 하지만 수어 통역사, 문자 통역, 음성 해설을 갖추지 못해서 접근성을 포기하는 방식은 아닌 거죠. 저마다의 방식으로 접근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라운드 테이블」, 63쪽

낮게 부착된 작은 글씨의 해설을 읽어보고 싶어 허리를 잔뜩 구부려 힘들게 작품 설명을 읽는 관객, 계단이나 갤러리에 접근하기 힘들어 포기하는 관객… 미술관에 와서 심리적으로 괜히 주눅이 드는 관객… 작품 해설을 봐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부딪히며 전시 감상을 포기하는 관객이나 안내 리플릿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관객, 나이가 들거나 장애가 있어 신체 모양이나 움직임이 타인과 달라 미술관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힘든 관객, 그리고 미술관에 진입해도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관객. 이들을 위해 미술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우리는 모두 이 안에 함께 있습니다」, 71-72쪽

유니버설 디자인, 배리어프리 디자인, 인클루시브 디자인 등 용어는 다양해지고 있지만 아직도 해당 디자인 영역은 주류 디자인만큼 질리도록 논의되지 않고 있다.

「점자 만들기 키트, ‘점킷’」, 132쪽

먼 걸음 하여 전시를 방문했음에도 전시의 특정 면면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 문화를 체험할 수 없는 사람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배리어프리는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며, 이에 대한 찬반의 가늠이 필요치 않다.

「시각예술 전시의 접근성을 위한 배리어프리 실천하기」, 164쪽

2011년 지하철 고속터미널역 환승 계단에 있던 휠체어 리프트가 고장 난 걸 보고 역으로 전화했다. 역무원은 되물었다. “어머니, 계단 위쪽이면 9호선이나 3호선에, 아래쪽에 계시면 7호선에 전화하세요.”

「서울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에서 모두의 1층까지」, 165쪽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말은 너무나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에 적용된다니, 모두를 위한다니. 그래서 그 유토피아가 (적어도 글자체에 관해선)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내가 한번 쓴소리를 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공덕역의 경사로를 오르던 때가 떠올라 그 마음은 조용히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좀 말이 안 되고 완벽하지 않으면 아무렴 어떤가.

「‘유니버설 디자인’, 디자이너들이 찾는 유토피아」, 173-174쪽

마주 본 검은 벽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고, 순차적으로 높아지는 디렉팅 자료들을 보며 마지막엔 비장애인의 높이에서도 관람하기에 무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듯, 배려라는 목적으로 둔 발판 역할의 밀크박스에서는 특정 관람객의 완전한 배제를 굳이 고집한 아집마저 느껴졌다.

「배리어프리 예술을 원합니다」, 200쪽

차례

인사말 | 최슬기
여는 글 | 김린, 김형재

연표
• 배리어프리 연표 | 조예진

좌담
• 라운드 테이블

기획
• 우리는 모두 이 안에 함께 있습니다:
신체적, 정서적 미술관 접근성 향상 프로그램과 쉬운 글 해설 기획하기 | 추여명
• 모두를 위한 타이포그래피:
모두를 위한 디지털 콘텐츠(웹, 모바일) 접근성에서 타이포그래피 | 김대년
• 접근성: 감각 기호로 번역되는 시청각 기호 | 서수연
• 쉬운 정보가 말하는 정보 접근성 | 주명희, 홍사강

프로젝트
• 점자 만들기 키트, ‘점킷’ | 노유리
• 프리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 원희승
• 초과하는 몸, 엇갈리며 연결되는 말 | 이주현
• 점자와 그림을 같은 자리에 놓기: 대체 텍스트에서 병렬 텍스트로 | 이솜이
• 시각예술 전시의 접근성을 위한 배리어프리 실천하기: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제23회 졸업 전시의 배리어프리 기획을 기반으로 | 박정원
• 서울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에서 모두의 1층까지 | 홍윤희
• ‘유니버설 디자인’, 디자이너들이 찾는 유토피아: 그러나 존재하지 않은 | 정태영

부록
• 접근성 작업자를 위한 키워드 사전 | 이충현

비평
• 긴장과 설렘으로 만난 타이포그래피의 세계 | 장근영
• 배리어프리 예술을 원합니다 | 김환
• 공연이 전시가 될 때:
손영은의 〈종이울음〉과 양위차오의 〈칠판 스크리보폰〉 | 김뉘연
• 타이포잔치 2023 리뷰 | 제임스 채
• 하이 리스트 하이 리턴: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 | 김수은
• 에벌레 시절부터 지켜본 범나비 | 심우진

논고
• 기능적 이미지의 참조적 활용을 통한 창작과 그 예시 | 배민기
• 형태와 구조 분석을 통한 한글 명조체 세분법 제안
—sm세명조, sm신명조, sm신신명조, 산돌명조, 윤명조를 중심으로 | 박미정
• 점자를 포용하는 타이포그래피 및 인쇄를 위한 지침들 | 조예진

새로운 계절
• 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 니나 파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2022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2023

학회
참여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글자와 타이포그래피를 바탕으로 소박하며 진솔한 입장에서 깊은 생각을 나누고 이를 통해 한국의 시각문화 성장이라는 바람을 이루기 위해 2008년 9월 17일 사단법인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국내외 회원의 연구와 교류, 그리고 협력을 통해 매년 정기적으로 좌담회 및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작품을 전시하며, 학술논문집 『글짜씨』를 발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우수한 타이포그래피 문화 확산에 힘쓰고 있다.
은 안그라픽스에서 발행하는 웹진입니다. 사람과 대화를 통해 들여다본
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