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를 다루는 예술로서 타이포그래피는 시각예술과 언어예술의 이중적 성격을 띤다. 타이포잔치 2013은 그 중첩 지대에 숨은 문학적 잠재성을 탐구한다.
현대 타이포그래피는 주어진 글을 꾸미는 수동적 역할을 넘어, 글 자체를 생성, 해석, 공유하는 일에 적극적이고 비평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문학과 인문학에 국한한 주제였던 글쓰기의 조건과 관습, 속성을 탐구하면서, 타이포그래피는 그 자체로 문학의 한 형태가 된다. 한편, 문학에서도 순수한 언어를 넘어 시각적, 물질적 장치를 실험하는 전통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구체시에서 울리포 집단, 메타픽션과 시각적 글쓰기 등으로 이어진 형식 실험은 언어예술의 테두리를 넓히며 여러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곤 했다. 아울러, 확산된 디지털 제작과 네트워크 기술은 글을 쓰고, 나누고, 읽는 조건에 깊은 영향을 끼치면서, 텍스트의 속성과 위상을 근본적으로 변형하고 있다.
타이포잔치 2013 ’슈퍼텍스트’는 이처럼 흔들리는 문자 문화 전통을 뚫고 새로이 솟아나는 텍스트를 읽고 쓰면서, 고도로 확장되고 유연하고 동적이고 민감한 그 텍스트의 조건과 가능성을 살펴본다.
이 책은 타이포잔치 2013에 참여한 60여 작가와 작품을 상세히 소개하고 논한다. 아울러, 책에는 타이포잔치 2013의 주제를 확장하는 글이 실려 있다. 참여 작가 가운데 한 명인 루이 뤼티는 18세기 《트리스트럼 섄디》에서 윌리엄 H. 개스의 1995년 작 《터널》에 이르는 소설 작품에서 검정 지면이라는 비언어적 장치가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본다. 브라이언 딜런은 존 모건의 타이포잔치 2013 설치 작품 ?블랑슈 또는 망각?에 관한 글에서 어떻게 자신이 갈리마르 총서에 매료되었는지 회상한다. 오베케의 ‘기생 잡지’ 《나는 아직 살아 있다》 24호는 쌍둥이 서체를 통해 쌍둥이 자매 이야기를 들여주면서 타이포그래피의 서사적 가능성을 실연해 보인다. 타이포잔치 2013 큐레이터 가운데 한 명인 유지원은 Y자의 진화 과정에 초점을 두고 글자의 형성 자체에 잠재한 서사를 탐색한다. 박현수는 ‘타이포그래피적 상상력’과 그것이 한국 근대 시에서 맡은 역할을 논한다. 마지막으로, ‘무중력 글쓰기’ 공동 기획자이기도 한 이정엽은 고층 빌딩 전면을 역동적 시작(詩作)의 지면으로 삼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성찰한다.
—타이포잔치 2013 총감독 최성민
전시를 성실히 기록하고, 그리고 도록 스스로 전시의 일부가 되는 것. 내가 생각하는 좋은 전시 도록의 덕목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타이포잔치 도록은 두 가지 조건을 훌륭히 만족시킨다. 처음부터 웹사이트와 도록을 전시의 총 합에 포함한 계획이 그렇고, 최성민 총감독이 직접 기획자, 필자, 번역자, 편집자, 교정자, 아트디렉터로 참여해 모든 글과 이미지를 꼼꼼하게 조율하고 다듬은 덕분이다.
전시와 도록이 같은 기획의 결과물인 것은 이 책의 차례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고유명사’, ‘농담’, ‘대화’, ‘미백색’, ‘사전’ 같이 최성민 총감독이 각 작품에 붙인 별명을 ㄱㄴㄷ순으로 소개하며, 외부 필자의 에세이와 타이포잔치의 부대 행사들 역시 같은 원칙에 따라 배치한다. 외부 필자의 에세이와 타이포잔치의 부대 행사들도 같은 원칙에 따라 배치한다. 전통적으로 도록의 초반에 소개되는 총감독의 머리말 역시, 이 책에서는 ㅅ 으로 시작하는 다른 별명들 틈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엄격하고 기계적인 구성 원칙은 글과 이미지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적용된다. 도록의 모든 글, 즉 제목, 본문, 캡션, 크레딧, 페이지 번호는 층위에 관계없이 한 가지 서체 세트, 한 가지 급수로 표기했으며, 김경태 사진가가 일괄 촬영한 책 사진들 역시 실물의 비례를 지켜, 작은 책은 작게 큰 책은 크게 실었다.
2011년에 발간된 2회 타이포잔치 도록은 1회 도록의 디자인을 고스란히 리바이벌함으로써 10년 만에 부활한 비엔날레의 정체성을 상기시키려고 했다. 세 번째 도록이 그 두 책의 모습을 어떻게 계승해야 할 지, 혹은 부정해야할지 고민이 컸다. 여러 번 전시를 관람한 끝에 700페이지가 넘는 양장 제본의 위용을 포기하는 대신 ‘최소한의 책’이라는 태도를 취하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이번 비엔날레에 소개된 여러 작업물로부터 공통적으로 받은 인상이기도 하다. 지면을 분배하고, 용지와 제본 방식을 선택하는데 경제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무엇보다 쉽게 들고 볼 수 있는 책을 의도했다. 한편 이전 도록으로부터 본문 판형과 표지 디자인을 빌어오는 것으로 세 권의 연속성을 명확히 했다. 책의 배면에 솟구쳐오르는 ‘t’ 그래픽을 넣은 것도, 이전 도록의 띄장식을 이어가려는 의도였다.
—타이포잔치 2013 디자이너 유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