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타이포그래피는
무엇을 향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글짜씨 27』은 서혜의 논고 「고현학적 방법을 활용한 타이포그래피 교육의 효과 분석—타이포그래피 기초 지식 습득과 인지능력 향상에 대한 실험 연구」로 시작된다. ‘고현학’은 곤 와지로가 제창한 개념으로, 고고학이 과거의 흔적을 통해 과거를 연구하는 것과 달리 현재를 바라보며 당대의 도시 풍속과 세태를 탐구한다. 그 특성상 필드워크나 스케치 같은 현장에서의 체험이 중요하고, 후일 ‘노상관찰학’이 그 방법론을 이어받았다. 서혜는 디지털 기술에 의존하는 현재의 디자인 교육 체계를 보완하고자 고현학적 방법을 통해 학생들이 “관찰, 기록, 추측, 토론, 인지”라는 다섯 단계를 거쳐 타이포그래피 기초 지식을 습득하고 인지 능력이 향상되도록 유도했다. 강의 중에 학생들이 작성한 관찰카드와 토론카드 사례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박유선과 유도원은 앞선 논고의 다음 순서로 등장하는 여는 글 「2024년, 지금의타이포그래피 조망하기」에서 수록된 원고 전체를 간략히 소개하고, 특집 ‘타이포그래피 교육 현황 그리고 디지털’의 첫 번째 글 「디지털 타이포그래피 교육 현황 조사 2024」로 넘어간다. 다양한 교육 경력을 가진 타이포그래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해당 설문에서는 디지털 환경에서의 타이포그래피 교육 현황과 효과를 조사했으며, 각 문항에 자유도가 높아 응답자 각각 상세한 답변을 더했다. 「타이포그래피 소모임 인터뷰」는 ‘꽃’ ‘이름’ ‘한글꼴연구회’ ‘한글아씨’ 네 팀의 대학교 소모임과 인터뷰를 진행해 실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교육받는 학생들의 시각은 어떤지, 또한 그들 사이에서는 어떤 담론이 오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심우진의 「타이포그래피 배움배움 2: 가지가지 하는 디자이너, 사이러스 하이스미스」에서는 타입 디자이너이자 그래픽 아티스트, 교육자기도 한 사이러스 하이스미스와 만난다.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과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가 함께하는 ‘타이포그라피 배움배움’은 타이포그라피의 지난 배움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배움을 내다보는 자리다. 이곳에서 강연과 대담을 통해 이야기한 글자, 그림, 디자인, 교육을 지면에 기록했다. 908A(강이룬, 앤드루 르클레어)는 어도비 연례 콘퍼런스 ‘어도비 맥스(Adobe MAX)’에서 소개된 일러스트레이터의 실험적 AI 기능 ‘리믹스얼랏(Remix A Lot)’의 데모에 기반해 운을 뗀다. 일견 충격적인 그 데모를 소셜미디어에 올린 어느 유저의 한마디 “nvm we’re so cooked.”는 이 글의 제목 「아 됐고, 우린 그냥 끝났어」가 되었다. 강이룬과 앤드루 르클레어는 놀라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렇게 고도로 자동화할 디자인 도구들이 교육과 디자인의 미래에 미칠 영향까지 대화를 전개하며 디자이너의 역할을 고찰한다.
기고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한층 다채롭고 흥미로운 주제를 공유한다. 첫 번째 ‘디지털 타이포그래피 현황’에서는 디지털 환경과 타이포그래피의 변화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기록한다. 책을 만들 때 필요한 종이 사용량을 계산해 주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페이퍼맨’을 만든 최규호는 「종이와 사람, 그 사이에서」에서 개발, 디자인, 운영 등 작업 과정에 얻은 여러 사람의 도움을 강조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둘을 함께 놓고 사람을 이해하는 창의적인 방법을 계속 고민해 보고 싶다”는 그의 말은 디지털 시대의 우리가 결국 어디로 향해야 할지 고민할 때 참고할 만하다. 월간 『디자인』의 편집장 최명환은 「D+255」에서 월간 『디자인』과 디자인프레스가 공동 운영하는 디지털 플랫폼 ‘디자인플러스(D+)’ 오픈 이후 255일간 이어진 여정을 담았다. 시행착오와 소기의 성과, 새로운 시도와 지금까지 이어가는 실험을 가감 없이 토로한 글에서 종이 매체와 웹 환경 각자의 강점이 무엇인지, 서로 무엇을 주고받아야 할지에 관한 성찰이 묻어난다. 김나무의 「글자의 몸과 그 너머: 인공지능 시대의 타이포그래피」는 AI가 생성한 타이포그래피로 이루어졌다. 글 속 이미지는 “주석이자, 삽화이자, 정체성”이며, ‘그리드스케이프(GridScape)’라는 AI와 인간이 함께 만든 언어로 쓰였다. “종국에 이 모든 과정과 결과는 AI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귀착”하는 동시에 인간의 자기 성찰과 창조 가능성을 제시한다. 「디지털 시대에 다시 쓰는 리소 인쇄」는 리소 인쇄와 일러스트레이션 기반의 디자인 작업을 하는 ‘포푸리’ 운영자 홍세인과의 인터뷰 형식이다. 디지털 매체가 다수인 오늘날 특징과 한계점이 명백한 리소그라프(risograph)라는 인쇄 기법으로 작업하며 겪는 고충과 그럼에도 리소 인쇄기를 사용하는 이유, 물성이 주는 힘을 엿볼 수 있다. 반면 이하림은 「스크린 타이포그래피 XYZ」에서 “종이 위의 글자들이 스크린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표현하며, 스크린 타이포그래피의 최근 변화를 X, Y, Z축을 기준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 흐름을 기록한다. 여기서 X축은 글자 사이의 조판, Y축은 글줄 사이의 조판, 그리고 Z축은 거리 간의 조판으로 특히 Z축 배치도 가능하다는 점을 스크린 타이포그래피의 특징적인 점으로 꼽는다. 함지은의 「텍스트힙의 시대, 독자와 독서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은 근래의 텍스트힙(text-hip) 및 과시적 독서 현상에 한 축을 더한 리커버 에디션 마케팅을 북 디자이너 관점에서 들여다보고자 세 갈래의 작업기를 모아 소개한다. 겉만 예쁜 책에서 머물기보다 독자들을 결국 알맹이(내용)로 이끄는 다리를 짓는 마음으로 “치열하게 아름다운 책 한 권을 만들겠다”는 그의 다짐을 보면, 작금의 독서 현상은 그저 우연이 겹친 한순간의 유행이 아니라 작업자들이 쌓아온 노력의 산물로 여겨진다. 서유경은 디자이너였던 자신이 법률가로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함께 디자이너와 창작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지침서를 만들고자 『디자인 법률 사용 설명서』를 썼음을 밝힌다. 이 책이 많은 이에게 실질적인 도움으로 작용하고, 향후 디자이너와 창작자들이 안정적이고 공정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두 번째 ‘디지털 타이포그래피와 글자체’는 독립 디자이너의 글자체와 기업 전용 글자체를 두루 조명한다. 먼저 가장 유명한 무료 오픈 소스 폰트 「프리텐다드」는 이제 중앙행정기관 사이트의 기본 글자체로도 사용된다. 개발로부터 3년이 흐른 지금, 제작자인 길형진과의 인터뷰 「「프리텐다드」 그 후」에서 글자체 개발 비화를 통해 오픈 소스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가늠한다. 강인구의 「프로젝트 「긱산스」」는 “한글과 라틴 알파벳의 적절한 비례를 찾기 위해” 시작된 여정으로, 도판과 함께 「긱산스」의 너비, 굵기, 비례 등을 탐구하며 문자의 질서를 통합하고 구조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전은경은 「『밥 벌어주는 폰트』 vs 『Our Typeface』: 현대카드와 배달의민족 전용 글자체가 한국 시각 문화에 미친 영향」에서 현대카드와 배달의민족의 전용 글자체 사례를 통해 기업 정체성과 브랜딩에서 전용 글자체가 가지는 힘과 문화적 영향력을 분석한다. 특히 책으로 묶는 작업을 정태영 부회장과 김봉진 창업자가 직접 챙길 만큼 신경 썼다는 점이 그 중요성을 환기한다. 강유선의 「아리따 프로젝트, 「아리따」 글자체 전시」는 기업 전용 글자체를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책과 전시를 활용해 사회의 문화적 자산으로까지 자리 잡게 한 선례를 보여준다. 「아리따」가 단순한 글자체를 넘어 아모레퍼시픽의 문화 사업이 되기까지, 그 뒤에 숨어 있는 많은 사람의 수고와 정성 또한 설명한다. 김태헌의 글 「물체」는 그가 디자인한 글자체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글의 제목에는 그저 선으로 이루어진 평면의 글자체가 아닌 “물성을 가진 하나의 ‘물체’로 보아주길” 그리고 “「물체」로 조판된 텍스트를 하나의 물리적인 군집(우주)으로 보아주길” 바라는 그의 희망이 담겨 있기도 하다. 글자체 제작 과정보다는 지향점에 도달하기 위해 질문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심도 있게 읽을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 ‘타이포그래피 이벤트’는 국내·외 주요 이벤트 현장을 살핀다. 「도쿄 TDC 애뉴얼 어워즈 수상자 인터뷰」는 도쿄 타입 디렉터스 클럽(Tokyo Type Directors Club) 애뉴얼 어워즈의 최근 수상자 중 한 가오, 게이타 오니시, 캐런 앤 도나치 & 앤디 시미오나토 이렇게 세 팀을 인터뷰했다. 이들의 작업은 전형적인 타이포그래피 작업이 아닌 새로운 형태를 띠며, 그럼에도 도쿄 TDC에 제출하고 수상함으로써 미래의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힌트를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기창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온 최고의 포스터 100」에서 포스터 공모전 《100 베스테 플라카테》 전시 현장을 찾아 여러 디자이너와 포스터에 관해 토론하고 성찰한다. 포스터란 무엇인지, 포스터를 포스터답게 만드는 건 무엇인지, 포스터인 것과 포스터가 아닌 것의 경계는 무엇인지, 현장의 분위기와 함께 그들 사이에 오간 이야기의 단편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 김태헌의 「전주국제영화제 아트디렉션」은 그가 2023년부터 전주국제영화제의 아트디렉터를 맡아 신중하게 고군분투한 경험을 공유한다. 거의 프로그램이 그 성격을 방향을 결정하는 영화제에서 그는 디자인의 역할을 “진정성을 부여”하고 “시각적인 용기와 영감을 주”는 것으로 정의하고 그 일을 묵묵히 수행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