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이 아닌 스크린에서 타이포그래피는 어떤 잠재력을 가지는가
스크린의 무한성과 한계성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글자들
책보다 휴대폰과 컴퓨터 화면을 더 많이 마주하는 요즈음, 스크린 위 타이포그래피는 그 어느 때보다 보편적이면서도 독특하다. 스크린이라는 장소는 자주 마주하는 만큼 보기에 편한 타이포그래피가 만연한 곳인 동시에 실험 정신을 마구 일으키는 어디서도 보지 못한 타이포그래피 실험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타이포그래피뿐 아니라 그래픽, 이미지, 코딩 등의 시각 문화 또한 스크린 위에서 풍성하게 생산되고 있다. 더 이상 새로운 요소가 아닌 스크린에서 타이포그래피는 어떻게 우리에게 낯익어지면서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을까? 『글짜씨』 23호에서는 스크린 타이포그래피를 비롯한 디지털 시각 문화의 역사와 현주소를 고루 살펴본다.
「좌담」의 라운드 테이블에는 스크린 타이포그래피의 최전선에 있는 디자이너 강채원, 고민경, 고윤서, 손영아, 송예환, 임솔, 조우식 그리고 황이슬이 참여했다. 김형재 디자이너가 2020년에 진행한 프로젝트이자 전시인 《Not Only But Also 67890》을 모티브로 잡아, 2019년과 2022년 사이에 디자인계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 중 ‘스크린 타이포그래피’라는 주제에 부합하면서 참여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건들을 소개하며 최근 5년의 스크린 시각 문화의 역사를 되짚는다.
「도구」에서 고민경은 《서베이》를 기획하게 된 배경을 밝히고 디자인 도구의 변화를 중심으로 최근 그래픽 디자인 신의 경향을 살핀다. 박신우는 『it matters.』 웹진 프로젝트의 자세한 진행 과정을 설명하며 그래픽 생산도구로서 인스타그램을 활용했던 색다른 작업 경험을 공유한다. 심규하는 다중 사용자 인터랙션을 기반으로 하는 컨디셔널 디자인 방법론을 소개하며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와 참여자는 어떻게 공동 창작자가 되는지 설명한다. 「교육」에서 홍은주는 시각디자인학부에서 진행해온 타이포그래피 및 코딩 강의 커리큘럼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다양한 학생의 기발한 작업물들을 공유한다. 민구홍은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 첫 순간을 기술하며 역사적인 웹사이트들의 탄생을 연대기순으로 나열한다. 김린은 대학에서의 시각 디자인 교육 경험과 미디어센터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긱이코노미 시대의 산업 수요를 반영한 시각 디자인 교육 방법론 연구를 소개하고, 긱이코노미가 시각 디자이너에게 어떻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기록」에서 박고은은 전통 매체와 디지털 매체로 구축된 아카이브의 사례를 들며 그 차이점을 지적한다. 권혜인은 인터넷 아트 전시 《웹-레트로》를 회고하며 지난 30년간 월드 와이드 웹에서 시도된 새로운 미술을 되짚고, 새로운 질서 그 후는 직접 가꾸고 있거나 관심 있게 지켜보는 웹사이트 42선을 소개한다. 「매체」에서 티슈오피스는 메타버스 쿤트라의 배경을 화성으로 설정한 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UX 디자인 회의 방식인 ‘스프린트’를 제시한다. 정사록은 그래픽 디자인을 재미있게 하고자 시작한 워크숍에서 여러 참가자와 수많은 질문을 주고받으며 결국엔 그래픽 디자인을 다시금 즐기게 된 과정을 공유한다. 박세진은 패션 브랜드의 확장과 다각화 활동을 이야기하며 온·오프라인 매체의 본래 의도가 전복되는 순간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임솔은 디자이너들이 SNS에 작업물을 올리면서 발생한 열화와 왜곡 현상이 오히려 새로운 기법과 속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비평」에서 오혜진은 스텐실 인쇄를 주제로 코우너스에서 출간된 책 『Paper and Stencil Printing』의 디자인을 비평한다. 표지, 재단선, 책입 등 책의 곳곳에 스며든 의도를 섬세한 시선으로 읽어낸다. 김슬기는 기존 글자체 「라바」를 한글화하는 과정에서 라틴 글자 디자인의 맥락을 이으면서도 한글 고유의 맥락을 따른 부분을 구분하며 다국어 글자체의 특징을 설명한다. 김미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전시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를 비평한다. 1950-1960년대를 중심으로 근현대 디자인의 태동과 전시를 조망하는 전시의 맥락 안에서 각 작품의 의도를 상세하게 해부한다. 「논고」에서 심우진과 정태영은 수많은 연구자의 노력으로 완성된 「한글 글꼴 용어 2022」를 발표한다. 지난 40여 년간 지속해온 글꼴 용어 연구에서 ‘알기 쉽고 쓰기 좋음’이라는 한글의 마음씨를 본받아 그동안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웠던 한글 글꼴의 다양한 용어를 알기 쉽게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