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그라픽스

글짜씨 17: 젠더와 타이포그래피

LetterSeed 17 : Gender and Typography

절판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는 글자와 타이포그래피를 연구하기 위해 2008년 창립되었다. 『글짜씨』는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에서 2009년 12월부터 발간한 국제 타이포그래피 저널이다.

『글짜씨 17: 젠더와 타이포그래피』는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의 주된 쟁점이었던 젠더 이슈를 타이포그래피 및 그래픽 디자인의 측면에서 다룬다. 퀴어 또는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그래픽 디자인 작업물의 사례를 소개하고, 디자인계의 성차별적 구조를 돌아본다. 2017년 한 해동안 발간된 출판물 가운데 선정한 〈타이포그래피가 아름다운 책 2017〉도 수록했다. 2015년 이래로 매 호 새롭고 독특한 북디자인을 선보이며 독자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선사해 온 6699프레스의 마지막 『글짜씨』 작업이기도 하다.

편집자의 글

기울어진 세계를 바로잡기 위해
디자인과 디자이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글짜씨 17: 젠더와 타이포그래피』에 수록된 글은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룬다. 첫째는 젠더 이슈를 다룬 디자인이 어떤 태도와 형식을 취할 수 있는가이며, 둘째는 국내외 디자인계가 어떤 식으로 성차별적 관행을 형성하고 유지해 왔는가이다. 이성애자 남성 위주의 편향된 사고와 질서 아래에서는 소수자를 위한 디자인이 생산되지도, 적절하게 논의되지도 못하기에 이 두 가지 사안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이 책 『글짜씨 17: 젠더와 타이포그래피』는 사회적 가치가 중요하게 변화하는 시점에 디자인과 디자이너가 이 변화와 어떻게 관계되고, 어떤 역할을 해왔으며 또 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려는 시도이다.

텀블벅 프로젝트 스페셜리스트 김괜저는 2011년 이후 텀블벅에서 성사된 프로젝트를 통해 젠더 이슈를 다루는 독립 창작자들의 활동 양상을 살펴본다. 이들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의 이슈를 선명하게 반영하며 국내 퀴어 및 페미니즘 운동의 지형도를 보여준다. 그래픽 디자이너 우유니게는 유럽 여행에서 만난 페미니즘 관련 출판물을 소개한다. 예술가의 책, 좌파 정당의 잡지, 평론가의 저술 등을 살피며 남성 중심적 사회 안에서 디자이너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짚어본다. 그래픽 디자이너 이도진은 경직된 성별 이분법에 문제를 제기하며, 남성과 여성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성 중립 화장실 표지판 디자인에 관해 질문한다.

그래픽 디자이너 신인아는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의 유명한 질문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를 인용하며 20세기 미국에서 활동한 ‘위대한 여성 디자이너’들의 생애를 살피고, 여성을 배제하는 업계 및 사회 구조 안에서는 위대한 여성 디자이너가 나타날 수 없음을 역설한다. 교육 프로그램 기획자 정아람은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며, 축제 현장에서 태어난 이 깃발이 오늘날 어떻게 다양성에 대한 환대의 상징이 되었는지 추적한다. 월간 《디자인》 편집진은 오늘날 한국 디자인계가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매체의 역할은 무엇인지 논의한다. 디자인·미디어 연구자 정승연은 서구의 인쇄 문화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여성이 어떤 위치를 차지했고, 기술 문화를 장악한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을 정보 생산에서 배제해 왔는지를 타이포그래피의 측면에서 짚어본다.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가 2016년부터 선정한 ‘타이포그래피가 아름다운 책’도 실렸다. 2017년 출간된 단행본과 잡지 가운데 열한 권을 결선 진출 작품으로 선별했고, 그 가운데 안그라픽스의 《턣》 2호와 초타원형 출판의 『CopyCat』을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했다.

책 속에서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에서 젠더라는 사회적 쟁점에 대해 적절한 인식을 갖추지 못한 창작 활동은 마치 비가 거세지는 야외에서 체육대회를 강행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기존에 활동하던 창작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분야의 ‘기울기’와 사회적 인식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창작물에 담아내는 경우가 많아졌고, 젠더에 관한 문제의식을 분명한 동기로 내걸고 활동을 시작하는 신진 창작자도 늘었다.

김괜저, 「젠더, 창작, 그리고 돈: 페미니스트와 퀴어의 텀블벅 프로젝트」, 11쪽

여성의 일에 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 금기시되어 입 밖에 꺼내기 어려운 것들, 충분히 연구되거나 기록되지 않은 것들, 변화가 시급한 것들이 끝없이 쌓여있다. 단지 여성의 일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창작자들은 사회가 의도적으로 가려 놓은 이런 부분을 다양한 목소리로, 다양한 방법으로 드러내려는 시도를 고민하고 지속할 필요가 있다.

우유니게, 「유럽에서 만난 페미니즘의 도구들」, 21쪽

미국에서 시작된 이 논의는 우리 주변에 여성과 남성으로 매끄럽게 나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몇몇 단체와 기업, 학교에서 성중립 화장실을 증설하기 시작했고, 논의는 이렇게 우리 곁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이런 인식은 20세기 모더니스트가 만들었던 매끄러운 픽토그램에 다시금 가닿는다. 양분되어 있던 세계가 사실은 무지개처럼 경계 없는 스펙트럼임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성에 관한 시각 정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그러니까 성중립 화장실의 상징을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까?

이도진, 「화장실 앞에 선 당신: 모든 젠더를 위한 시각 언어의 가능성」, 36쪽

위대한 디자이너는 어떤 사람인가? 위대한 디자이너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기지’와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며, ‘운명적’ 계기를 통해 그래픽 디자인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다. 이런 전설적인 영웅 서사는 학교나 기관 혹은 구전을 통해 전수되며, 수많은 인터뷰와 출간물, 특히 두꺼운 연구서를 통해 그 위치를 공고히 한다. 한 명의 ‘위대한 디자이너’를 기르는 데는 온 마을(디자인계)이 필요한 법이다. 종교적 의식에 가까운 이 과정에 여성이 끼어들 자리는 좀처럼 나지 않는다.

신인아, 「위대한 여성 디자이너를 찾아서」, 49쪽

이처럼 혐오가 만연하던 시기, 시청사에 걸린 커다란 무지개기는 국가와 시민 사회가 배제했던 성소수자들이 ‘벽장’의 바깥으로 나올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게이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밖으로 나와 눈에 보이는 존재가 되고, 거짓에서 나와 진실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베이커는 말했다. 그러므로 무지개기는 서로 다른 성적 정체성과 지향을 지닌 이들이 “이게 바로 나야!”라고 스스로를 긍정하는 외침이자 세상에 존재한다는 선언이며 인권의 표상인 것이다.

정아람, 「차이에 더 많은 권위를: 무지개기에 대한 이야기들」, 57쪽

그런 의미에서 매체가 해야 하는 역할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디자인 산업 내 남녀 임금 격차를 조사하고 실태를 다룬다거나, 미국의 ‘3% 콘퍼런스(The 3% Conference)’처럼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비율을 조사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좋겠죠. 디자인계에서 페미니즘 이슈는 일부 여성 디자이너 사이에서만 회자되고 공감될 뿐, 정작 기득권층에서는 그 심각성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요. 적어도 월간 «디자인»을 읽는 이들이라면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수긍할 수 있도록, 우리가 지금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 제시해야겠죠.

전은경, 김민정, 김은아, 오상희, 정명진, 최명환, 「이제 우리는 생각해왔고, 말해왔고, 행동해온 것에 관해 쓰려 한다」, 66쪽

1960년대 말에 일어난 여성 해방 운동의 물결은 복사기를 집어삼켰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손쉽고 저렴하게 그리고 널리 알릴 수 있는 매체와 도구를 필요로 했고, 이에 복사기보다 적합한 것은 없었다. 복사집 주인들은 여성들이 무엇을 복사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것은 인쇄소가 검열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던 이전 시대와는 사뭇 달라진 것이었다. 인쇄소에서는 수작업으로 조판을 하든 자동주식기를 이용하든 조판공이 글을 한 단어씩 읽어가며 판을 짜야 했고 그렇게 완성한 판은 교정쇄를 거쳐야만 했다. 이런 절차를 악용하여 조판공과 교정 담당자는 그들의 눈에 거슬리는, 다시 말해 가부장적 사회상과 남성 중심적 인쇄문화에 맞지 않는 글을 검열했다. 이런 검열은 글뿐만 아니라 디자인에도 적용되었다. 인쇄공들은 본인들이 전수받은 전통적 인쇄 미학에 맞지 않는 이미지와 레이아웃을 임의대로 조정하고는 했는데, 이 때문에 여성주의를 비롯한 새로운 내용은 물론 새로운 시각적 형식도 검열과 제재를 받았다.

정승연, 「글씨 부리는 여자」, 78쪽

차례

유정미 | 서문
김괜저 | 젠더, 창작, 그리고 돈: 페미니스트와 퀴어의 텀블벅 프로젝트
우유니게 | 유럽에서 만난 페미니즘의 도구들
이도진 | 화장실 앞에 선 당신: 모든 젠더를 위한 시각 언어의 가능성
신인아 | 위대한 여성 디자이너를 찾아서
정아람 | 차이에 더 많은 권위를: 무지개기에 대한 이야기들
전은경, 김민정, 김은아, 오상희, 정명진, 최명환 | 이제 우리는 생각해왔고, 말해왔고, 행동해온 것에 관해 쓰려 한다
정승연 | 글씨 부리는 여자

타이포그라피가 아름다운 책 2017
글짜씨 17 참여자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학회 규정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글자와 타이포그래피를 바탕으로 소박하며 진솔한 입장에서 깊은 생각을 나누고 이를 통해 한국의 시각문화 성장이라는 바람을 이루기 위해 2008년 9월 17일 사단법인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국내외 회원의 연구와 교류 그리고 협력을 통해 매년 정기적으로 좌담회 및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작품을 전시하며, 학술논문집 『글짜씨』를 발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우수한 타이포그래피 문화 확산에 힘쓰고 있다.
은 안그라픽스에서 발행하는 웹진입니다. 사람과 대화를 통해 들여다본
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