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세계를 바로잡기 위해
디자인과 디자이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글짜씨 17: 젠더와 타이포그래피』에 수록된 글은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룬다. 첫째는 젠더 이슈를 다룬 디자인이 어떤 태도와 형식을 취할 수 있는가이며, 둘째는 국내외 디자인계가 어떤 식으로 성차별적 관행을 형성하고 유지해 왔는가이다. 이성애자 남성 위주의 편향된 사고와 질서 아래에서는 소수자를 위한 디자인이 생산되지도, 적절하게 논의되지도 못하기에 이 두 가지 사안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이 책 『글짜씨 17: 젠더와 타이포그래피』는 사회적 가치가 중요하게 변화하는 시점에 디자인과 디자이너가 이 변화와 어떻게 관계되고, 어떤 역할을 해왔으며 또 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려는 시도이다.
텀블벅 프로젝트 스페셜리스트 김괜저는 2011년 이후 텀블벅에서 성사된 프로젝트를 통해 젠더 이슈를 다루는 독립 창작자들의 활동 양상을 살펴본다. 이들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의 이슈를 선명하게 반영하며 국내 퀴어 및 페미니즘 운동의 지형도를 보여준다. 그래픽 디자이너 우유니게는 유럽 여행에서 만난 페미니즘 관련 출판물을 소개한다. 예술가의 책, 좌파 정당의 잡지, 평론가의 저술 등을 살피며 남성 중심적 사회 안에서 디자이너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짚어본다. 그래픽 디자이너 이도진은 경직된 성별 이분법에 문제를 제기하며, 남성과 여성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성 중립 화장실 표지판 디자인에 관해 질문한다.
그래픽 디자이너 신인아는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의 유명한 질문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를 인용하며 20세기 미국에서 활동한 ‘위대한 여성 디자이너’들의 생애를 살피고, 여성을 배제하는 업계 및 사회 구조 안에서는 위대한 여성 디자이너가 나타날 수 없음을 역설한다. 교육 프로그램 기획자 정아람은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며, 축제 현장에서 태어난 이 깃발이 오늘날 어떻게 다양성에 대한 환대의 상징이 되었는지 추적한다. 월간 《디자인》 편집진은 오늘날 한국 디자인계가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매체의 역할은 무엇인지 논의한다. 디자인·미디어 연구자 정승연은 서구의 인쇄 문화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여성이 어떤 위치를 차지했고, 기술 문화를 장악한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을 정보 생산에서 배제해 왔는지를 타이포그래피의 측면에서 짚어본다.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가 2016년부터 선정한 ‘타이포그래피가 아름다운 책’도 실렸다. 2017년 출간된 단행본과 잡지 가운데 열한 권을 결선 진출 작품으로 선별했고, 그 가운데 안그라픽스의 《턣》 2호와 초타원형 출판의 『CopyCat』을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