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구성
인쇄물에서의 친환경 타이포그라피 / 구자은
친환경 타이포그라피는 ‘뉴 알파벳’ 실험들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하나의 제시에 불과하다. 따라서 제시한 결과물이 기존 서체에 비해 가독성이 떨어질 수도 있고, 오히려 더 많은 문제점을 만들어 낼 수도 있으며, 친환경 운동에 기여하는 정도가 미비하다고 지적받을 수도 있다. 그것이 비록 처음에는 부족해 보이더라도 모든 새로운 접근은 가치가 있다. 엉뚱한 발상의 노력은 대개 진보를 낳는다. 타이포그라피의 탄생 이래, 적절한 친환경성을 위해 연구되고 개정된 부분은 타이포그라피의 부수적인 영역으로 제한되어 왔다. 인쇄에 쓰이는 장비, 종이, 잉크, 화학약품 등의 제조업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친환경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새로운 제품과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열거한 영역들은 산업 발전과 더불어 계속 진화하기 때문에 오늘의 해결책이 내일은 무의미해질 수 있다. 마치 오늘날 종이는 스크린으로, 잉크는 픽셀로 진화했듯이 말이다. 타이포그라피에서 시공을 초월한 불변의 매개체는 바로 글자 그 자체이다. 친환경 타이포그라피가 이 시대의 가장 획기적 친환경 디자인 해결책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종이와 잉크를 절약하는가? 그렇다. 절약의 결과가 당장은 미비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가능성이다. 물리적인 글자가 갖는 친환경 요소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 가능성은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동등한 가치로 받아들여지길 희망한다.
활자의 형태변별요소 조합에 따른 활자 추출 / 김나연
활자를 제공하고 활용하는 대부분의 서체개발회사들은 자사의 활자를 사용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기존 분류 체계법과 함께 자체적 분류를 만들어 사용한다. 타이포그라피의 활자 분류는 이론적인 활자 조직을 정립하기 위하여 생긴 개념이며, 반드시 필요한 기초연구이다. 그러나 활자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그 수가 급증함에 따라 기존 분류 체계는 기타 카테고리 양만을 증가시켰다. 인자는 활자의 형태 특징을 말하며 그 조합으로 활자의 성격이 정의된다. 이러한 형태인자를 통해 활자 추출을 할 수 있었으며 이는 분류를 위한 형태 추출이 아니라 인자 조합을 함으로써 비롯된 분류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형태인자를 통한 활자정의 개념을 바탕으로 문자권별 활자 형태인자 기준 선정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및 활용화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타이포그라피라는 디자인 분야만의 연구가 아닌 다양한 연계연구를 바탕으로 활자정의를 통한 글꼴 검색 시스템 구축이 실용화된다면 사용자에 따른 정확한 활자 검색이 가능해지고, 객관적인 글꼴사용 가이드라인이 제시될 수 있다. 또한 비전문가들도 글꼴을 선택할 때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활자체 활용도 증가될 것으로 예상된다. 글꼴 대치의 정확성 향상과 활자 디자인권 보호 역시 정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통해 효율성과 실효성이 향상되리라 생각된다. 새로운 방식의 연구를 통하여 글꼴의 활용방안을 다양하게 지원할 수 있기를 바라며, 동시에 다른 시각에서 활자를 바라보는 폭이 넓어졌으면 한다. 또한 활자정의가 앞으로 타이포그라피 분야에서 활자형태에 관한 관심을 이끌며, 활자의 활용 방안과 영역 확장에 대한 발전을 지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회의, 몽타주, 생명평화무늬 / 안상수
눈에 보이는 상징이란 무늬이다. 번개, 구름, 비, 바람 등의 날씨는 하늘무늬(天文)이고, 강, 산, 들은 땅무늬(地文)이다. 우주 삼라만상의 무늬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상징으로 나타난다. 심벌이나 로고타입이란 우리가 사맛(流通)코자 하는 뜻을 멋지어낸 생각 무늬이다. 생각 무늬는 바람을 담는다. 저의 바람은 회의적 발상을 거쳐 생명평화 무늬로 멋지어졌다. 우리들의 상상을 일깨우는 이미지나 무늬는 원형(元型)적 존재들의 직관적인 변형 재조합을 통해 새로운 기호로 탈바꿈한다. 한정된 DNA 씨알들이 아름다운 생명의 올을 엮어 내듯이……. 새로운 일뜻의 애지음이란 ‘오래된.미래’에 그 비밀 작법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시작은 종국에 가서는 생명에 대한 지식이다. 모든 깨달음이란 이 생명의 수수께끼에 대한 놀라움이며, 무한히 그리고 항상 신선히 피어나는 생명에 대한 경외인 것이다. 존재로 생성되고 살다가 그리고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존재와 존재 사이에 무엇이 오가고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것이 흐른다는 것이 얼마나 환상적인 일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면서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우리의 온갖 지혜를 짜내어도 생명을 창조해 내지 못한다. 우리의 창조라는 것은 모두 생명이 없는 것이다.
— 슈바이처, 1994: 121
라틴알파벳의 이탤릭체와 한글의 흘림체 / 유지원
문자는 여러모로 생태적인 특성을 가진 만큼 둘러싼 환경에 반응하고 그 시대와 사회에 반응한다. 한글은 글자체계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고 사용인구가 적으며 글씨체와 활자체의 경험과 다양성이 부족하여 본문 기본형 정체 활자체를 보완하는 활자체로서 이탤릭체의 자체적 전통이 다듬어져 오지 않았다. 그러나 한글에는 방한 초서체부터 궁체 흘림체, 오늘날의 펜글씨 흘림체와 손글씨 흘림활자체에 이르는 흘림체의 자산이 있다. 라틴알파벳 지면에서 이탤릭체는 문장부호를 사용하거나 밑줄을 긋는 등 다른 장치들에 비해 눈에 편안하고 또렷하게 부각된다는 점에서 대체할 수 없는 지위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문법적 요소로서 영문의 예를 인위적이고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은 신중하게 지양해야 하며, 국문에서의 용도는 사용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다. 그보다 본문용 한글흘림체는 심미적 요소로서 타이포그라퍼나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는 다채로운 표현 가능성을, 독자에게는 한국어 본문을 읽고 보는 즐거움을 제공하며 지면에 힘을 실어 주리라 기대한다. 타이포그라피의 다양한 기본 표현력을 갖추는 것은 한 문자시스템의 힘이다. 본문 기본형 활자체의 일원으로서 한글흘림체를 개발하는 것은 한글의 자체적 역사를 기반으로 한 자존성을 유지하면서도 라틴알파벳과 조화로운 상호관계를 이루도록 하며, 이탤릭체의 한글 등가물에 대한 현실적인 요구에, 다양한 본문 표현력을 갖추는 시대적인 요구까지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잉크를 아끼는 글자 / 이용제
아끼는 글자는 잉크를 아끼는 글자이며, 이용제가 아끼는 글자이다. 그래서 아끼는 글자는 특정한 폰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글자에도 ‘아끼는’ 작업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끼는 작업의 의도를 다른 작업으로 파생할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창작자가 있고 이용제는 그중에 하나이다. 그 많은 창작자와 의도적으로 차별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디자이너로서 글자 디자이너로서 역할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을 수행하고자 할 뿐이다.
지속가능한 한글의 가치 / 한재준
한글은 놀랍고 흥미로운 글자이다. 크고 멋지게 디자인되었다. 글자와 소리의 관계가 절묘하게 조화되었고, 의미까지 아우르는 실마리가 보인다. 눈과 귀와 머리를 하나의 체계로 반응하게 하는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소리와 글자가 함께 작동하는 통합 매체 적용에 유리하고, 정보 소통의 상호작용 효과도 높여 줄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한글이 그런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창제 때의 한글이 높은 철학과 완벽에 가까운 원리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알파벳의 꿈’이 사라질 수 있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단순한 글자’라는 찬사들도 이어지기 어렵다. 오늘의 한글은 복잡하고 산만하다. 과학적이고 경제적인 글자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이다. 현행 글자꼴로는 한글의 진짜 가치를 설명하기에도 모순되고, 그 우수성을 실제로 체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저마다의 편의와 일상의 관습, 시대의 변화와 유행에 따라 적당히 변용해 온 것이다. 부분에 대한 연구와 실천은 있었으나 통합적인 접근이 부족했고, 해설서의 내용도 관심 밖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 560여 년 전에 이도가 일궈 냈던 독창적인 디자인 철학과 원리는 퇴색하고 변질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다행히도 한편에서는 진짜 가치가 되살아나고 있다. 창제정신과 원리가 반영된 활자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손전화 등 각종 단말기 입력 방식에서도 근거를 가진 활용이 시도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숨은 공로는 무엇보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굴(1940년)에 있을 것이다. 디자인 철학서이며,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이 없었거나 발굴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한글엔 희망이 없었을 것이고, 미래의 한글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방치되어 왔으나 해설서를 찾은 글자, 한글의 새로운 역사가 열리고 있다. 잠자고 있던 한글정신이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디자이너들은 사용자들을 더 존중하고 배려하게 되었으며, 사용자들도 디자이너들에게 보다 더 근거가 있는 문화적인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의 연속은 디자인된 한글의 본래 가치를 되살려내는 원동력이 될 것이며, 그 속에 담긴 디자인 태도와 철학, 원리와 방법은 많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상상의 세계와 창작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