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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위한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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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시각 예술 분야에서 급진적인 실천을 하는 젊은 작가, 건축가와 디자이너를 초대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을 중심으로 미술관 공간을 모색한 ‘젊은 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주석’ 전시의 주제를 확장한 앤솔로지다. 오래된 미술관 공간과 그것의 미래를 단초로 미술관이라는 제도 공간에 대한 비평을 시도한다.

미술관의 젊음과 늙음을 규정하는 사물에 대한 이야기부터 도시 공유지로서 미술관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간 미술관 제도에서 조명받지 못한 건물, 공간, 사물에 대한 비평적 담론을 제안하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을 중심으로 작품, 작가 그리고 미술사 자체에 밀려 진지한 논의를 하지 못한 미술관 건축과 이에 개입하는 디자인 실천을 돌아본다. 이러한 논의는 예술을 둘러싼 환경 변화와 사회 위기 속에서의 작품 제작과 큐레토리얼 실천을 위한 새로운 탐색 도구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의 글

미술관도 나이가 든다

시간을 통과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공간의 미래에 다는 주석

미술관도 나이가 든다. 단순하고 한편 당연한 사실 같지만, 미술 제도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미술관의 “에이징”은 이제 당면하게 되는 새로운 질문이다. 1986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과천관)은 곧 40년이 된다. 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야심차게 추진된 “국가적 야망”의 산물이자, 서울과 청주에 국립현대미술관을 추가로 건립하기 전까지 국내 미술 제도의 중심에 있던 미술관은 동시대 ‘현대’ 미술을 품는 “미술을 위한 집”으로서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 이 책은 이를 질문하는 시작점에 있다.

“미술관의 재가동에 대한 진단은 막연한 차원에 머물지 않고 미술관 운영과 관련한 실질적인 이슈를 던진다. 한국의 ‘현대’ 미술관 건축물이 점점 나이를 먹고 있는 지금 오래된 미술관 건축물의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새롭게 할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공립미술관들은 이제 건물의 수명으로는 완공 30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미술관이다. 한국에서 30년은 재건축이나 철거와 같이 건축물의 생사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리노베이션과 같은 물리적 재생을 고민하는 두 건물은 오늘날 미술관이 직면한 긴급한 이슈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본문 중에서)

책에서는 시간을 통과하는 미술관을 건축가와 디자이너, 미술평론가와 큐레이터, 작가의 시점을 오가며 다양한 시각으로 연결한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임대근은 현대미술의 조건으로서의 미술관과 과천관의 지난 공간적 실험을 살펴본다. 작가이자 국제갤러리 이사인 윤혜정은 MZ 세대를 중심으로 한 미술관 공간 경험의 변화와 팬데믹 이후의 관람 행위에 대해 논하고, 미술평론가 곽영빈은 과천관의 ‘기념비’가 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다다익선〉을 중심으로 기술과 기계의 자연사와 미술관과의 관계를 은유한다.

그래픽 디자이너 최성민은 순수미술과 구분해 상업미술로 분류하는 그래픽 디자인이 최근 미술관 제도 안에서 인큐베이팅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젊은 모색 2023’의 기획자이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인 정다영은 동시대와 점차 간극이 생기는 현대미술관 공간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큐레토리얼 방식을 모색한다. 서울과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 심소미는 이미 ‘오래된 미래’를 거치고 있는 파리 미술관들의 실험을 소개하고, 작가이자 변호사인 김원영은 과천관의 램프코어를 중심으로 휠체어를 탄 관람객과 미술관 공간과의 관계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마지막으로 건축가 최춘웅의 글을 통해 오로지 작품 감상을 위해 용도가 지정된 유일한 건축 유형인 ‘전시장(미술관)’의 낡은 부분들로부터 촉발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책 속에서

미술관은 현대미술의 장치이자 조건이다. 즉 미술관은 대중에게 미술작품을 선보이는 공간적, 제도적 배경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현대미술을 규정하는 개념적 조건이기도 하다. 현대의 문화 관습에 익숙한 우리가 전자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미술관을 미술품 감상하러 가지 그럼 뭐 하러 가겠나. 그러나 후자라면, 미술관에 관한 얼마간의 논의가 필요하다. 즉 미술관을 단지 미술품의 전시 공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기능을 구현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해할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미술관에 쌓인 모색들: 1986~현재」, 13쪽

오래된 미술관은 오히려 자유롭다.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들의 미술관 리모델링 프로젝트가 대대적으로 유행하고 있지만, 사실 낡은 공간을 잘 간직하는 건 오래된 미술관만의 특별한 권리다. 여타의 건축물과는 달리, 연륜 있는 미술관이 품은 시간성은 역사적 유산인 동시에 전복의 대상이 된다. (…) 가변적 공간 혹은 구조물들이 생겨났다 모습을 감추는 광경, 그 안에서의 사건이 만약 흥미롭다면 그건 이곳이 오래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일련의 과정이 시간과 공간,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이에서 예술적 진동을 만들어내고, 이곳은 제3의 공간을 찾는 이들의 런웨이이자 무대로 다시 삶을 살아낼 테니 말이다.

「미술관 공간 경험의 진화: 사이에서 공명하는 제3의 공간」, 34쪽

‹TV 시계›(1963)나 ‹달은 제일 오래된 TV›(1965), 혹은 ‹TV 정원›과 같은 작업들이 웅변하듯이, 백남준이 구현한 것은 한때 지극히 인위적이었던 기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혹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즉 더 이상 독자적인 대상, 또는 형상(figure)으로 인지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배경(ground), 또는 환경(environment)이자 자연으로 변형되는 궤적”을 선취하는 것이다. 한때 ‘브라운관’이라 불리던 CRT 모니터들의 노화로 가동이 중단된 ‹다다익선›은, 이렇게 ‘기계도 나이 든다’는 자연사적 의미에서 ‘기계의 풍화’를 ‘미리 기념’하는 (반)기념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폐허와 건설현장의 (반)기념비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시차적 당대성」, 64쪽

아무튼 이렇게 미심쩍고 깔끔하지 않으며 균형도 맞지 않는 분석 기준에 따라 2012년 이후 10년간의 작업을 분석해 보니, 전체 491점 중 미술관이 관여한 작업은 256점으로 계산된다. 미술관이 관여하지 않은 미술 관련 작품은 108점, 기타 예술 관련 작품은 88점이며, 비예술 문화 영역 작업이 33점이다. 그리고 나머지 여섯 점이 ‘기타’에 속한다. 즉, 우리 작업에서 미술관과 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으로 높다. 문화 영역 밖에서 이루어진 작업은 무시해도 좋으리만치 미미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미술관은 작업의 명줄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래픽 디자인에 들어온 미술관」, 100쪽

미술관의 재가동에 대한 진단은 막연한 차원에 머물지 않고 미술관 운영과 관련한 실질적인 이슈를 던진다. 한국의 ‘현대’ 미술관 건축물이 점점 나이를 먹고 있는 지금 오래된 미술관 건축물의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새롭게 할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이나 아르코미술관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공립미술관들은 이제 건물의 수명으로는 완공 30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미술관이다. 한국에서 30년은 재건축이나 철거와 같이 건축물의 생사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리노베이션과 같은 물리적 재생을 고민하는 두 건물은 오늘날 미술관이 직면한 긴급한 이슈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미술관의 돌봄을 위한 큐레이팅」, 131쪽

루브르 박물관에서 방문객이 없는 동안 벌어진 리허설이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박물관 관람 시간 동안 매일같이 노동자로서 박물관의 돌봄 시스템에 기여하고 있지만 정작 예술로부터 소외돼 있는 직원들이 관객으로 등장함으로써 이뤄졌다. 이는 문화 산업이 착취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소외 문제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대개는 건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직원 출입구를 통해 출퇴근하던 직원들이, 리허설 공연이 종료된 후 관람객 출입구인 유리 피라미드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은 노동자와 문화 소비자의 경계가 전복되는 상황을 발생시킨다.

「에이징 뮤지엄: 시간을 재영토화하기」, 163쪽

(직접 가본 바는 없지만) 구겐하임에 비하면, 과천관의 램프는 경사가 가파르고 벽면에 전시물을 걸기도 쉽지 않은 구조다. 장애인의 ‘접근성’ 측면에서 효과적인 시설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그러한 목적으로 램프가 설계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나는 흥미로웠다. 램프 위에서 휠체어를 탄 몸이 이동할 때, 김태수나 백남준이 애초에 계획하지 않은 어떤 종류의 효과가 발생할 여지는 없을까? 1.3m 위치에서 바라볼 때 작품은 어떻게 달라 보일까? 그 다름은 ‘미학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일까?

「램프코어에서 잘려 나간 것들」, 174쪽

집은 편하게 작품을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작품이 독점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반면 전시장(미술관)은 오로지 작품 감상을 위해 용도가 지정된 유일한 건축 유형이다. 다시 말하자면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작품 감상이다. 미술관에서 전시 공간 외 다른 모든 곳은 작품에 집중하는 사이사이 적절한 분절과 휴식의 리듬을 주기 위한 보조 시설이다. 만약 이 보조 시설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을 침범한다면 집보다도 어수선한 공간이 될 것이다. 좋은 미술관은 집에서 느끼는 작품과의 친밀함이나 사색의 여유가 가능한 전시 공간을 먼저 제공해야 한다.

「미술을 위한 집」, 194쪽

차례

서문 – 정다영
미술관에 쌓인 모색들: 1986~현재 – 임대근
미술관 공간 경험의 진화: 사이에서 공명하는 제3의 공간 – 윤혜정
폐허와 건설현장의 (반)기념비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시차적 당대성 – 곽영빈
그래픽 디자인에 들어온 미술관 – 최성민
미술관의 돌봄을 위한 큐레이팅 – 정다영
에이징 뮤지엄: 시간을 재영토화하기 – 심소미
램프코어에서 잘려 나간 것들 – 김원영
미술을 위한 집 – 최춘웅
지은이
도판 출처

곽영빈

곽영빈은 미술평론가이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객원 교수로, 미국 아이오와대학에서 「한국 비애극의 기원」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이 제정한 최초의 국공립 미술관 평론상인 제1회 SeMA-하나 비평상을 수상했다. 최근 저술로는 「눈 먼 과거와 전 지구적 내전의 영원회귀: 오메르 파스트와 임흥순의 차이와 반복」, 『파도와 차고 세일』(공저, 문학과지성사, 2023), 「인프라 휴머니즘: 팬데믹 이후 자연과 기술, 세상을 돌보기」, 『미술관은 무엇을 연결하는가』(공저, 국립현대미술관, 2022), 「창문과 스크린, 영화와 건축 사 이의 미술관과 VR」, 『한류-테크놀로지-문화』 (공저, KOFICE, 2022), 「레플리컨트와 홀로그램, AI의 (목)소리들」, 『블레이드러너 깊이 읽기』(공저, 프시케의숲, 2021) 등이 있다.

김원영

국가인권위원회, 법무법인 덕수 등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2013년부터 공연예술 연구와 창작에 관여했고 2019년부터는 안무, 극작, 무용수 등으로 공연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장애와 인권·예술·기술의 관계 등을 다루는 책과 논문을 발표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사계절, 2018), 『사이보그 가 되다』(공저, 사계절, 2021) 등의 책을 썼고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법› ‹인정투쟁: 예술가편› ‹무용수-되기› 등의 공연에 출연했다.

윤혜정

윤혜정은 1990년대부터 문화 예술의 최전선에서 동시대 예술가들의 작업과 철학, 그리고 삶에 대한 글을 써왔다. 영화 전문지 『필름 2.0』의 창간 멤버로 에디터 생활을 시작한 후 『하퍼스 바자』와 『보그』에서 피처 디렉터로 활동했으며, 2009년에 패션과 예술의 공존을 조명하는 『바자 아트』를 창간했다. 저서로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현대미술에 대한 『인생, 예술』(2022), 각 분야 예술가 19인과의 인터뷰를 담은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2020)이 있으며, 『김중업 서산부인과 의원: 근대를 뚫고 피어난 꽃』(2019)을 공저했다. 『보그』 『하퍼스 바자』 『바자 아트』 등의 필자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강연 자리에서 부지런히 독자 및 관람객들을 만나고 있다. 현재 작가이자 국제갤러리 이사로 재직 중이다.

심소미

심소미는 서울과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로, 도시 공간과 예술 실천의 관계를 전시, 공공 프로젝트, 리서치를 통해 탐구하고 이를 큐레토리얼 담론으로 재생산하는 데 관심을 둔다. 202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 블루 프라이즈 디자인 2021’ ‘이동석 전시기획상 2018’을 수상했다. 문화연구지 계간 『문화/과학』의 편집위원이며, 콜렉티브 ‘리트레이싱뷰로’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큐레이팅 팬데믹』 『주변으로의 표류: 포스트 팬데믹 도시의 공공성 전환』이 있다.

임대근

임대근은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동대학원 미술이론과를 졸업하고 멜버른대학 미술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부터 현재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기획 업무를 주로 담당하며 «멀티플/다이얼로그∞»(2009), «무제»(2015), «균열»(2018), «박이소: 기록과 기억»(2018), «MMCA 현대차 시리즈 2019: 박찬경-모임»(2019), «가면무도회»(2022) 등을 기획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전시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정다영

정다영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서 건축과 디자인 분야 전시 기획과 글쓰기를 하고 있다. 기획한 주요 전시로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2013), «이타미 준: 바람 의 조형»(2014), «아키토피아의 실험»(2015), «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2017), «김중업 다이얼로그»(2018),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2020), «젊은 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주석»(2023) 등이 있다. 『파빌리온, 도시에 감정을 채우다』(홍시, 2015), 『건축, 전시, 큐레이팅』(마티, 2019) 등 여러 책을 기획하고 공저자로 참여했다.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한국관 공동 큐레이터(2018), 건국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2019~2021)를 지냈다.

최성민

최슬기와 최성민은 ‘슬기와 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2인조 그래픽 디자이너다. 슬기와 민이 함께 지은 책으로 『작품 설명』 『오프화이트 페이퍼, 브르노 비엔날레와 교육』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 등이 있고, 최성민이 옮긴 책으로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레트로 마니아』 『파울 레너』 『현대 타이포그래피』 등이 있다. 최성민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두 사람 모두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원 재학 당시 마이클 록에게 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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