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레핀미술대학 교수이자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 서양화가
한국인 최초의 미술학 박사이자 이민족 출신이라는 한계를 딛고 무려 35년 동안 러시아 명문 레핀미술대학의 교수직을 맡았던 한국인이 있다. 사실주의 화가 변월룡, 그는 러시아 미술계의 거장으로서 존경과 인정을 받았으나 정작 너무나 사랑했던 조국으로부터는 버림받은 존재였다. 북한에서는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제명되었으며, 남한 미술계에서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1916년, 이중섭과 같은 해에 태어나 서로 다른 장르에서 미술계의 신화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머나먼 이국땅 러시아에서 작품 활동을 펼쳤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천재 화가다. 그는 이주민의 자손으로 연해주에서 태어나 평생을 냉전 시대의 소련 땅에서 살았으나, 죽을 때까지 한글 이름을 고집했고 자신의 그림마다 한글을 새겨 넣었을 정도로 한국인으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적인 소재인 소나무를 즐겨 그렸고, 한국전쟁 후 포로 교환의 현장에서 역사의 아픔을 기록화로 남겼으며, 수많은 한국인의 인물화를 그렸던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하고 고국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배어 있다. 고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변월룡은 북한미술의 초석을 놓는 고문 역할로 1년 3개월 평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이후 단 한 번도 다시 가지 못한 고국을 평생 그리워한 나머지, 해마다 수천 킬로미터의 먼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연해주를 찾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절절한 그리움을 그림으로밖에 담아낼 수 없었던 비운의 천재였다. 유화, 판화, 데생, 수채화, 포스터에서부터 내용으로는 인물화, 풍경화, 전쟁화, 역사화에 이르른다. 또한 동판화와 석판화, 연필화, 파스텔화, 펜화 등 변월룡의 작품은 한 사람이 그린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방대하고 훌륭하다. 그중 동판화는 변월룡이 생전에 가장 존경했던 화가 렘브란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다.
한국미술사의 빈약한 뿌리를 세우고 기틀을 마련한 거장의 귀환
서양화의 역사를 나무에 비유하면 르네상스에서 사실주의까지를 뿌리로, 인상주의는 줄기로, 후기인상주의 이후를 가지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20세기 초반에야 비로소 서양화가 도입된 데다 그것도 일본을 한번 걸쳐 변형된 서양화를 받아들였다. 정통 서양화 기법에 대한 단단한 기초와 체계 없이 소위 현대미술이라 일컫는 후기인상주의 이후의 유파부터 받아들인 한국 서양미술은 태생적으로 한계와 취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통해 조국 스페인의 잔혹한 참상에 항거하고, 심지어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남길 때,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우리에게는 마땅히 내세울 만한 인물화나 역사화, 기록화가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조국의 현실을 외면한 한국 화가들의 역사 인식이 부족했던 것도 간과할 수 없겠지만, 실제로 그런 복잡한 구도와 웅대한 규모의 작품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화가의 부재가 더 정확한 이유라 하겠다. 그렇기에 변월룡의 존재가 더욱 놀랍고 소중하다. 무엇보다 이렇게 허약한 한국 서양화의 뿌리를 튼튼히 해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러시아의 대표 화가 샤갈도 입학하지 못했다는 레핀미술대학에서 학생으로 12년간 수학하고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35년간 레핀의 교수를 지낸 이 거장은, 그 탁월한 실력을 고국에 관한 기록화와 인물화를 남기는 데 발휘했다. 특히 〈북한에서〉 〈포로 교환〉 〈판문점〉 〈평양 복구〉 〈남북 분단의 비극〉 〈남조선의 자유와 통일을 위해 전진!〉 〈북조선 해방 기념일 1945년 8월 15일, 평양〉등이 그것이다. 그가 지녔던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이 수작들은 당시 북한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지만, 이 또한 우리 역사 속의 엄연한 현실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테다. 변월룡은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를 비롯해 문학가인 벽초 홍명희, 민초 이기영, 화가이자 수필가로 유명한 근원 김용준, 남북의 부자 ‘새박사’로 유명한 원홍구 박사 초상 등의 인물화는 한국미술사의 면면을 다채롭게 물들인다.
평생을 한국인으로 살았고 죽어서도 한국인이기를 원했던 진정한 민족 화가
변월룡은 1953년 소련과 북한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북한의 초청을 받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북한과 짧은 시간 교류를 가졌을 뿐이지만, 평양미술대학의 기초를 세우고 북한의 화가들을 지도한 스승으로서 북한미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정치와 선동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고국의 풍경과 인물, 아픈 역사를 담아내는 데 헌신을 다한 그의 이름은 신화이자 전설로 남아야 했지만, 영구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되었다. 안타깝게도 공헌의 기록은 삭제되고 그의 흔적은 잊혀 갔다. 또한 분단으로 경직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공산국가 소련의 화가인 변월룡의 존재를 또 하나의 조국 남한에서조차 완전히 지워 버렸다. 1990년 5월 25일, 변월룡은 뇌졸중으로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한반도의 나머지 반쪽은 영원히 밟아 보지 못한 채, 더욱이 4개월 후면 한국과 러시아 간에 수교가 체결되는 사실조차 모른 채 영면에 들었다. 죽기 전 남긴 유언대로 무덤 비석에는 그의 이름이 한글로 새겨졌다. 고국은 그를 버렸을지언정 그는 고국을 버리지 않았다. 냉전시대에 평생 남의 땅에서 한국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를 진정한 ‘민족 화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마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평소 한국의 소나무를 그토록 좋아했고 렘브란트를 존경해마지 않았던 변월룡, 한국인보다 더 철저한 한국인으로 살았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러시아 미술의 심장부에서 인정과 존경을 받았던 위대한 작품세계와 한국미술사에서의 중요한 위치에 비해 그의 이름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매료되어 오랫동안 변월룡을 연구한 필자 문영대는 과거 화가의 이름과 작품을 알리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예술을 예술로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인해 번번이 무산되었음을 상기한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오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완전히 잊혔던 우리 미술사의 숨은 보배 변월룡, 이제는 그 이름 석 자가 이 땅에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