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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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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변월룡을 마주하며

지난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한국근대미술 거장 ‘변월룡’의 첫 전시가 열렸다. 코리아 디아스포라로 냉전시대를 살다 간 화가의 이름은 낯설었지만 그의 작품은 친근했다. 한국인의 정서가 담긴 소재인 소나무의 사용과 분단 직후 평양의 모습, 렘브란트를 연상케 하는 그림 기법까지, 동양화와 서양화를 넘나드는 능수능란함에 인간적인 시선을 지닌 거장의 등장에 대중과 평단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변월룡』은 그 전설의 시작이 된 이야기를 일부 보완하고 새롭게 디자인해 재출간한 책이다.

국내에 그의 이름을 알리는 데 기여한 이 책은 절판된 뒤로 여러 차례 복간 요청이 있었다. 우리에게 철저히 잊힌, 그러나 더는 잊혀서는 안 될 변월룡의 작품 세계를 발굴하고 고증한 미술평론가인 저자 문영대는 재출간 소식을 듣고 “변월룡의 이름으로 한국미술계가 더욱 풍성해졌으면 하는 마음뿐”이라는 소회를 전했다. 코로나19로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오늘날, 국가와 인종, 냉전과 해방, 통제와 자유 그리고 일상과 이상, 모든 경계와 혼란에서 중심을 지키며 주어진 생을 충실히 살다 간 화가의 삶이 겸허한 위안을 준다.

편집자의 글

러시아 레핀미술대학 교수이자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 서양화가

한국인 최초의 미술학 박사이자 이민족 출신이라는 한계를 딛고 무려 35년 동안 러시아 명문 레핀미술대학의 교수직을 맡았던 한국인이 있다. 사실주의 화가 변월룡, 그는 러시아 미술계의 거장으로서 존경과 인정을 받았으나 정작 너무나 사랑했던 조국으로부터는 버림받은 존재였다. 북한에서는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제명되었으며, 남한 미술계에서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1916년, 이중섭과 같은 해에 태어나 서로 다른 장르에서 미술계의 신화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머나먼 이국땅 러시아에서 작품 활동을 펼쳤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천재 화가다. 그는 이주민의 자손으로 연해주에서 태어나 평생을 냉전 시대의 소련 땅에서 살았으나, 죽을 때까지 한글 이름을 고집했고 자신의 그림마다 한글을 새겨 넣었을 정도로 한국인으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적인 소재인 소나무를 즐겨 그렸고, 한국전쟁 후 포로 교환의 현장에서 역사의 아픔을 기록화로 남겼으며, 수많은 한국인의 인물화를 그렸던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하고 고국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배어 있다. 고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변월룡은 북한미술의 초석을 놓는 고문 역할로 1년 3개월 평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이후 단 한 번도 다시 가지 못한 고국을 평생 그리워한 나머지, 해마다 수천 킬로미터의 먼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연해주를 찾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절절한 그리움을 그림으로밖에 담아낼 수 없었던 비운의 천재였다. 유화, 판화, 데생, 수채화, 포스터에서부터 내용으로는 인물화, 풍경화, 전쟁화, 역사화에 이르른다. 또한 동판화와 석판화, 연필화, 파스텔화, 펜화 등 변월룡의 작품은 한 사람이 그린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방대하고 훌륭하다. 그중 동판화는 변월룡이 생전에 가장 존경했던 화가 렘브란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다.

한국미술사의 빈약한 뿌리를 세우고 기틀을 마련한 거장의 귀환

서양화의 역사를 나무에 비유하면 르네상스에서 사실주의까지를 뿌리로, 인상주의는 줄기로, 후기인상주의 이후를 가지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20세기 초반에야 비로소 서양화가 도입된 데다 그것도 일본을 한번 걸쳐 변형된 서양화를 받아들였다. 정통 서양화 기법에 대한 단단한 기초와 체계 없이 소위 현대미술이라 일컫는 후기인상주의 이후의 유파부터 받아들인 한국 서양미술은 태생적으로 한계와 취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통해 조국 스페인의 잔혹한 참상에 항거하고, 심지어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남길 때,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우리에게는 마땅히 내세울 만한 인물화나 역사화, 기록화가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조국의 현실을 외면한 한국 화가들의 역사 인식이 부족했던 것도 간과할 수 없겠지만, 실제로 그런 복잡한 구도와 웅대한 규모의 작품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화가의 부재가 더 정확한 이유라 하겠다. 그렇기에 변월룡의 존재가 더욱 놀랍고 소중하다. 무엇보다 이렇게 허약한 한국 서양화의 뿌리를 튼튼히 해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러시아의 대표 화가 샤갈도 입학하지 못했다는 레핀미술대학에서 학생으로 12년간 수학하고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35년간 레핀의 교수를 지낸 이 거장은, 그 탁월한 실력을 고국에 관한 기록화와 인물화를 남기는 데 발휘했다. 특히 〈북한에서〉 〈포로 교환〉 〈판문점〉 〈평양 복구〉 〈남북 분단의 비극〉 〈남조선의 자유와 통일을 위해 전진!〉 〈북조선 해방 기념일 1945년 8월 15일, 평양〉등이 그것이다. 그가 지녔던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이 수작들은 당시 북한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지만, 이 또한 우리 역사 속의 엄연한 현실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테다. 변월룡은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를 비롯해 문학가인 벽초 홍명희, 민초 이기영, 화가이자 수필가로 유명한 근원 김용준, 남북의 부자 ‘새박사’로 유명한 원홍구 박사 초상 등의 인물화는 한국미술사의 면면을 다채롭게 물들인다.

평생을 한국인으로 살았고 죽어서도 한국인이기를 원했던 진정한 민족 화가

변월룡은 1953년 소련과 북한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북한의 초청을 받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북한과 짧은 시간 교류를 가졌을 뿐이지만, 평양미술대학의 기초를 세우고 북한의 화가들을 지도한 스승으로서 북한미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정치와 선동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고국의 풍경과 인물, 아픈 역사를 담아내는 데 헌신을 다한 그의 이름은 신화이자 전설로 남아야 했지만, 영구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되었다. 안타깝게도 공헌의 기록은 삭제되고 그의 흔적은 잊혀 갔다. 또한 분단으로 경직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공산국가 소련의 화가인 변월룡의 존재를 또 하나의 조국 남한에서조차 완전히 지워 버렸다. 1990년 5월 25일, 변월룡은 뇌졸중으로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한반도의 나머지 반쪽은 영원히 밟아 보지 못한 채, 더욱이 4개월 후면 한국과 러시아 간에 수교가 체결되는 사실조차 모른 채 영면에 들었다. 죽기 전 남긴 유언대로 무덤 비석에는 그의 이름이 한글로 새겨졌다. 고국은 그를 버렸을지언정 그는 고국을 버리지 않았다. 냉전시대에 평생 남의 땅에서 한국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를 진정한 ‘민족 화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마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평소 한국의 소나무를 그토록 좋아했고 렘브란트를 존경해마지 않았던 변월룡, 한국인보다 더 철저한 한국인으로 살았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러시아 미술의 심장부에서 인정과 존경을 받았던 위대한 작품세계와 한국미술사에서의 중요한 위치에 비해 그의 이름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매료되어 오랫동안 변월룡을 연구한 필자 문영대는 과거 화가의 이름과 작품을 알리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예술을 예술로 보지 않고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인해 번번이 무산되었음을 상기한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오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완전히 잊혔던 우리 미술사의 숨은 보배 변월룡, 이제는 그 이름 석 자가 이 땅에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책 속에서

변월룡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본 북한 화가들은 그의 능수능란하고 거침없는 손놀림에 찬사를 보냈다. 빠르면서 정확하고, 부드러우면서 힘 있는 필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거기에다 미술이론 지식까지 해박한 변월룡에게 금세 매료되었다. 또 북한 화가들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도 이끌렸다. 항상 미소 짓는 부드러운 인상과 조용조용한 말투, 몸에 밴 예의와 겸손한 태도 등은 호감을 자아내는 데 충분한 요인이었다.

130쪽

김주경 학장은 1954년 9월 28일자 편지에서 “양시 정거장에서 선생님과 사모님이 떠나실 때 찍은 사진을 몇 장 보내드립니다. 이때 양시 정거장에서는 특별히 우리를 위해서 발차 시간을 2분 늦추었다고 합니다.”라고 썼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환송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으면 발차 시간을 늦추었을까. 이 대목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235쪽

변월룡은 나라의 정신과 민족성이 깊이 반영돼야 좋은 그림이 된다고 말한다. “설령 선진국에서 좋은 재료는 빌려 올지라도 그림에서는 민족혼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족 고유의 특징이 없어져 모방하게 된다.”

255쪽

변월룡은 이번 고국방문이 무산된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고국으로 갈 길이 영영 막혀 버렸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일을 겪은 후 변월룡은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깊은 시름에 잠겨 있던 탓이다. 그런 시점에 이팔찬에게서 새해 그림 연하장이 왔던 것이다. 그 연하장이 시름에 잠겨 있던 변월룡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는지, 새해로 접어들면서 그는 조금씩 의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곧바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동판화를 그렸다. 1960년 새해 무렵에 그려진 다음 장의 동판화는 순전히 변월룡의 상상만으로 창조되었다. 변월룡은 이 동판화에다 당시의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글로 새겨 놓았다. 그는 판화 우측에 한글로 제목과 함께 보다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보고 싶은 청진을 보지 못하고 레닌그라드에서 깊은 생각만 가지고 그렸습니다. 변월룡”

324쪽

“그렇다. 우리의 직업은 정말 힘든 직업이다. 미술가는 또 데생 선생은 잠시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 배우지 않고서 그림을 잘 그릴 수는 없다. 사람이 연필을 종이에 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데생을 잘하는 사람인지 소질이 없는 사람인지 말이다.”

371쪽

변월룡은 전 생애에 걸쳐 인물화에서 특히 좋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인물화는 유화에서부터 데생, 동판화, 석판화, 수채화 등 장르도 다양하다. 어떤 작품들은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고 어떤 작품들은 작가 스스로가 원해서 그린 것이지만 어떤 작품이든 모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없다. 변월룡에게 흥미를 끌지 않는 인물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373쪽

변월룡은 굳이 총칼을 겨누지 않아도 어떤 전쟁화보다 주제와 감정이 확실히 드러나게 했다.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드러나게 하는 힘, 바로 이러한 점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415쪽

변월룡의 작품은 장르적으로 유화, 판화, 데생, 수채화, 포스터 등이 있고, 내용적으로는 인물화, 풍경화, 전쟁화, 정물화, 역사화 등으로 구분된다. 또 판화에는 동판화와 석판화가 있고, 데생에는 연필화, 파스텔화, 펜화 등이 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한 사람이 그렸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장르의 폭이 넓고 내용도 다양하다. 그중 동판화는 생전에 존경했던 서양화가 렘브란트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동판화는 큰 사이즈로 제작하는 것이 특히 어려운데, 변월룡은 무려 가로 90센티미터에 근접하는 크기의 작품까지 많이 남겼다.

419쪽

차례

글을 시작하며
프롤로그
– 잊을 수 없는 고국의 추억

1장 교과서 삽화를 그리던 연해주의 조선 소년
유랑촌에서 유복자로 태어나다
천부적 재능, 예고된 화가의 길
주독야화

2장 홀로서기를 배운 유학 시절
스베르들롭스크로 유학을 떠나다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사건
고난의 세월
유학이 가져온 행운과 기회

3장 소련의 심장부에서 예술가의 길로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가족 상봉과 레닌그라드 봉쇄
사랑의 결실을 맺다
변월룡이 존경한 교수들
졸업작품 〈조선의 어부들〉
레핀미술대학의 교수가 되다

4장 꿈에 그리던 고국의 품에 안기다
동경하던 고국으로
평양 시절
평양미술대학 학장 겸 고문으로 추대되다

5장 북한미술계의 거대한 산이 되다
송정리 시절의 평양미술대학
동양화에 관심을 돌리다
모든 학과에 영향을 미치다
데생의 중요성
한·중·일 서양화 도입에 관해
한국 구상미술의 현주소
변월룡의 위상

6장 지란지교를 나눈 북한의 화가들
세 사람의 벗
화가 문학수
화가 정관철
북한미술계의 삼두마차가 되다
또 한 명의 학장 김주경
과로로 쓰러지다
북한으로 온 아내
고국을 떠나오던 날의 풍경

7장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귀국
의혹
동양화 연구에 몰두하다
소련의 한인 화가
고국을 생각하며
갈망

8장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꺾인 꿈
북한 당국의 ‘귀화’ 권유
개인 화실을 얻다
레닌그라드에서 다시 만난 정상진
소련 대사 이상조에게 희망을 걸다

9장 그리움을 그림에 담다
그림에 마음을 담다
동판화 제작에 전념하다
해외동포 고국방문단
1960년 새해를 맞다
정체성을 찾아 연해주로
연해주에서 탄생한 그림들

10장 한국미술사의 위대한 거장
얻은 것과 잃은 것
예술 기행을 떠나다
사랑하는 가족
교수로서의 일상
화가로서의 삶
다양한 장르의 인물화
정관철과 북한미술

11장 타국에서 큰 별 지다
삶의 황혼기

글을 마치며
변월룡 등장의 의미
역사적 관점의 작품들
그 밖의 변월룡 작품의 특징
간간이 발견되는 변월룡의 흔적

변월룡 연보
다시 한 번 변월룡을 마주하며

문영대

현대백화점 현대미술관 큐레이터와 동아갤러리 수석 큐레이터를 역임하며 ‘부르델 조각’ ‘모딜리아니와 에콜 드 파리’ ‘카미유 클로델과 로댕’ 등의 전시를 기획했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게르첸국립사범대학교 유학 중에는 러시아예술아카데미의 후원을 받아 ‘거장으로의 길’을 개최했다. 고려인 화가 변월룡이란 존재를 발굴해 지금까지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변월룡』 외 『러시아 한인 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 『북한미술의 뿌리, 변월룡』 등이 있다. 경상남도 미술대전 심사위원과 경남대학교 미술교육과 겸임 조교수를 역임하고, 제8회 홍진기창조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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