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수출’에서 ‘디자인 서울’까지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디자인계에 ‘미술수출’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당시는 경제 개발과 국가 발전을 위해 국가가 전 국민을 동원하던 시대였다. ‘미술수출’은 디자인 역시 국가의 동원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수출을 염두에 두고 팔리는 디자인을 수행하라는 명령과 다름없었다. 저자는 ‘미술수출’이야말로 한국 디자인의 신화이며 유일한 이념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한국이 겪은 특수한 식민지적 근대, 국가주의 개발 이데올로기, 디자인의 도구화 이념 등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념을 담은 ‘미술수출’은 국가 주도의 디자인 진흥 체제를 만들어냈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디자인이 오로지 국가 발전, 물질적인 성장, 부의 증대, 소비 촉진을 위해 동원되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대대적으로 추진한 ‘디자인 서울’ 정책이 이를 증명한다. 오세훈 전 시장은 창의문화도시를 서울시의 발전 모델로 삼고 그 방편이자 수단으로 ‘디자인 서울’을 택했다. 1960년대 수출 증대를 위해 국가 주도로 추진한 디자인 진흥 정책과 마찬가지로 ‘디자인 서울’도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 디자인을 도구 삼은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한국 디자인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계획과 과제를 수행하는 데 진력했다. 그 과정에서 디자인은 본질을 잃고 정치, 경제와 같은 이름으로 변해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은 대단하고 특별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디자인이 정치, 경제, 전문가, 권력자와 하나로 묶이면서 대중은 디자인을 자신의 삶과 연관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됐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여러 방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데 그칠 뿐, 시민이 주체적으로 일상을 디자인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디자인, 일상으로 돌아가라
전 세계적으로 디자인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합리적 질서와 동질성, 보편성을 강조했던 근대 디자인으로부터 국지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 특수성에 주목하는 탈근대 디자인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디자인에 대한 기존 인식이 도전 받으면서 국제주의는 지역주의로, 소비주의 디자인은 지속 가능한 디자인으로, 형태 중심의 디자인은 구체적인 경험 중심의 디자인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외침이 커지는 양상이다.
한국의 현실은 어떨까. 저자는 한국이 공공성이 없는 식민지적 방식으로 근대화를 겪은 탓에 지나치게 획일화돼 있으며, 누구나 일류, 명품, 큰 것, 간판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나와 다른 것, 작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한국 사회이기에 예술처럼 다양하고 자유분방해야 하는 분야조차 국가와 기업의 논리에 매여버렸다는 것이다. 디자인은, 예술은 그동안 배반해온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개발과 권위주의의 이름에 사로잡힌 구시대를 끝내고 문화적이고 민주적인 소양을 갖춘 시민 주체가 이끄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작은 예술로 돌아가 예술이 시민들의 삶이 되고 일상 문화가 돼야 한다. 이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다. 획일화된 주류를 떠나 다르게, 나답게 살려는 시도가 많아질 때 가능할 것이다.
이제 개발 강박증에 사로잡힌 한국 디자인의 낡은 신화는 벗어버리자. 다름을 인정하고 작은 것에 눈을 돌리며 삶을 긍정적이고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디자인의 새로운 신화를 써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