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이야기가 쌓인 길과 ‘아주 작은 광장’에서의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또는 묵직하고도 소탈한 목소리
정재완이 대구로 터를 옮긴 건 2009년이다. 작은 도시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대학교에 진학한 이래, 정병규출판디자인 편집 디자이너와 민음사출판그룹 북 디자이너로 일하는 동안 서울에 머물다가 영남대학교 교수로 임용되며 거주지를 아예 옮긴 것이다. 흔히 이런 이력을 ‘탄탄대로’라고 한다. 하지만 정재완은 언제나 자신이 선 위치와 세상이 말하는 가치에 의문을 가지고 고민하며 문제를 제기해 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자기가 가본 적 없는 길로, 대로가 아닌 골목길로 향했다.
그는 골목길을 걷는다. 오래되고 좁고 구불구불하고 수많은 사람이 지나온 방향에 따라 여러 갈래로 어지럽게 나누어진, 그래서 언제나 낯선 골목길을 걷는다. 그의 글도 골목길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샛길로 빠지기도 하고, 방향을 잃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허름한 ‘무엇’을 발견하고 상념에 빠진다. 대구라고 하면 ‘보수의 심장’ ‘대프리카’ ‘고담 대구’ 같은 말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재완에게 도시는 그런 추상적인 구호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바닥에 새겨진 돌멩이의 흔적을 보면서, 벽에 걸린 크고 작은 글자들을 보면서 온몸의 감각으로 도시를 직접 목격했다.”
정재완이 디자인 저술가 전가경과 함께 사진책 출판사 ‘사월의눈’을 시작한 건 2014년이다. 출판사 이름은 말 그대로 4월에 창문 너머의 눈송이를 보고 지었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날씨가 신기하다며 넘길 일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우려스러운 현상이었다. 4월의 대구에 눈이 내린다는 것. 그 이면에는 현재 전 지구적으로 끊임없이 화두가 되는 환경 문제, 기후 위기가 있었다. 정재완은 이 책에서 그런 ‘이면’을, 자기가 살펴본 ‘속’을 말한다. 선거철마다 걸리는 현수막의 일회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먹고 마시기를 종용하는 치맥페스티벌을 위해 고기가 되는 수많은 생명에 대하여, 화려한 빌딩과 가림막에 에워싸여 그늘지고 고립된 쪽방촌에 대하여. 일상적인 풍경을 무심히 지나치기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본다.
책 『훈민정음』의 북 디자인을 하나하나 살피며 그 형식의 아름다움과 디자인 자산으로서의 가치에 접근하는 부분에서는 북 디자이너의 전문성이 돋보인다. 동시에 정재완은 『훈민정음』의 대중적 번역본이 마땅치 않음을 토로하며 아쉬워한다. ‘북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의 디자이너보다는 저자에 주목하는 언론의 무지함을, 공공 디자인 현장에서 디자이너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관행을 지적하기도 한다.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디자이너 및 청년 이야기, 정비 사업에 위협받는 ‘도시의 디자인 문화 자산’ 오래된 거리 글자 이야기 등에서는 디자인과 사회와 지역이 하나로 만나며 마치 “골목길과 골목길이 교차하는 아주 작은 광장”에 선 듯하다.
스스로의 글을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웅얼거림”이라고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묵직하면서도 소탈하다. 문제를 제기하는 그의 어조는 진솔하지만 냉소적이지는 않고,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담백함과 신중함이 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디자이너를 넘어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해 봐야 할 주제를 다루는 데 귀감이 된다. “어떤 문제를 제기하면서 답을 내고 싶은 순간이 없지 않았지만, 답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독자께서는 대구에서 살아가는 디자이너가 보고 생각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헤아려주시길 바란다.” 그가 디자인한 이 책의 물성에는 여타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실물로 만나보기를 권한다. 책을 직접 만져보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 디자이너의 의도가 전해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