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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골목길을 걷는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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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벗어나 대구로 간 디자이너가

대로를 벗어나 골목길에서 포착한 것들

『낯선 골목길을 걷는 디자이너』는 사진책 출판사 ‘사월의눈’의 북 디자이너 정재완이 월간 《대구문화》와 일간지 《영남일보》에 연재한 글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넓고 곧은 길보다 좁고 구부러진 골목길을 걷길 선호하는 저자가 대구라는 지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며 포착한 풍경과 생각을 글로 옮기고 사진을 함께 담아 직접 디자인했다. 돼지가 돼지고기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간판은 어쩌다 탄생했을까. 60층 넘는 초고층 빌딩이 이 도시에 왜 필요할까. 사투리는 왜 아직 문자화·시각화되지 않았을까. 세상을 보는 그의 관점은 디자인과 사회와 지역을 아우르며 현시대 가장 주요한 문제를 두루 환기함으로써,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에 눈길을 주고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이야깃거리를 건넨다.

편집자의 글

수많은 이야기가 쌓인 길과 ‘아주 작은 광장’에서의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또는 묵직하고도 소탈한 목소리

정재완이 대구로 터를 옮긴 건 2009년이다. 작은 도시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대학교에 진학한 이래, 정병규출판디자인 편집 디자이너와 민음사출판그룹 북 디자이너로 일하는 동안 서울에 머물다가 영남대학교 교수로 임용되며 거주지를 아예 옮긴 것이다. 흔히 이런 이력을 ‘탄탄대로’라고 한다. 하지만 정재완은 언제나 자신이 선 위치와 세상이 말하는 가치에 의문을 가지고 고민하며 문제를 제기해 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자기가 가본 적 없는 길로, 대로가 아닌 골목길로 향했다.

그는 골목길을 걷는다. 오래되고 좁고 구불구불하고 수많은 사람이 지나온 방향에 따라 여러 갈래로 어지럽게 나누어진, 그래서 언제나 낯선 골목길을 걷는다. 그의 글도 골목길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샛길로 빠지기도 하고, 방향을 잃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허름한 ‘무엇’을 발견하고 상념에 빠진다. 대구라고 하면 ‘보수의 심장’ ‘대프리카’ ‘고담 대구’ 같은 말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재완에게 도시는 그런 추상적인 구호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바닥에 새겨진 돌멩이의 흔적을 보면서, 벽에 걸린 크고 작은 글자들을 보면서 온몸의 감각으로 도시를 직접 목격했다.”

정재완이 디자인 저술가 전가경과 함께 사진책 출판사 ‘사월의눈’을 시작한 건 2014년이다. 출판사 이름은 말 그대로 4월에 창문 너머의 눈송이를 보고 지었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날씨가 신기하다며 넘길 일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우려스러운 현상이었다. 4월의 대구에 눈이 내린다는 것. 그 이면에는 현재 전 지구적으로 끊임없이 화두가 되는 환경 문제, 기후 위기가 있었다. 정재완은 이 책에서 그런 ‘이면’을, 자기가 살펴본 ‘속’을 말한다. 선거철마다 걸리는 현수막의 일회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먹고 마시기를 종용하는 치맥페스티벌을 위해 고기가 되는 수많은 생명에 대하여, 화려한 빌딩과 가림막에 에워싸여 그늘지고 고립된 쪽방촌에 대하여. 일상적인 풍경을 무심히 지나치기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본다.

책 『훈민정음』의 북 디자인을 하나하나 살피며 그 형식의 아름다움과 디자인 자산으로서의 가치에 접근하는 부분에서는 북 디자이너의 전문성이 돋보인다. 동시에 정재완은 『훈민정음』의 대중적 번역본이 마땅치 않음을 토로하며 아쉬워한다. ‘북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의 디자이너보다는 저자에 주목하는 언론의 무지함을, 공공 디자인 현장에서 디자이너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관행을 지적하기도 한다.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디자이너 및 청년 이야기, 정비 사업에 위협받는 ‘도시의 디자인 문화 자산’ 오래된 거리 글자 이야기 등에서는 디자인과 사회와 지역이 하나로 만나며 마치 “골목길과 골목길이 교차하는 아주 작은 광장”에 선 듯하다.

스스로의 글을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웅얼거림”이라고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묵직하면서도 소탈하다. 문제를 제기하는 그의 어조는 진솔하지만 냉소적이지는 않고,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담백함과 신중함이 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디자이너를 넘어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해 봐야 할 주제를 다루는 데 귀감이 된다. “어떤 문제를 제기하면서 답을 내고 싶은 순간이 없지 않았지만, 답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독자께서는 대구에서 살아가는 디자이너가 보고 생각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헤아려주시길 바란다.” 그가 디자인한 이 책의 물성에는 여타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실물로 만나보기를 권한다. 책을 직접 만져보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 디자이너의 의도가 전해지리라 믿는다.

책 속에서

내가 장소를 이해하는 방식은 걷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걸으면서 만나는 글자들을 보는 것이다. 큰길만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로는 장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오래되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비하면, 곧고 크게 닦인 길은 소리도 냄새도 폭력적이다. 그래서 나는 걷기 좋은 도시를 좋아한다. 국내든 해외든 어느 도시나 오래된 원도심은 걷기 좋다. 골목길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걸었다. 만들어진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걸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골목길은 즉흥적일 수 없다. 골목길은 사람과 세월의 감각이 고스란히 반영된다.

6쪽

지난 선거 기간 동안 거리에 펄럭이는 수많은 현수막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꼈을까. 혼란스럽고, 산만하고, 돈 아깝고,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파국의 시대에 일회용 현수막을 자랑스럽게 내거는 후보들의 생태 감수성이 무척 떨어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끄럽고 불편하고 쓰레기를 잔뜩 만들어내는 선거운동은 누가 허락한 것일까. … 지킬지, 못 지킬지, 안 지킬지 알 수 없는 공약을 커다란 바위에 정성스럽게 새길 일은 없겠지만, 현수막에 남발하는 것을 보면 공약 자체도 일회성처럼 느껴진다.

23쪽

고치는 것보다 새것이 더 쉽고 편한 세상이 되었다. 새것을 향한 우리의 욕망은 일상의 제품에서부터 거대한 도시로까지 번진다. 도시도 고쳐 쓸 수 있을까. 새것을 만드는 일도 훌륭한 디자인이지만, 고치는 일도 그에 못지않은 디자인이다.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디자인이다. 생각해 보니 심지어 인류는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우주를 바라본다. 지구를 고쳐 쓰기에는 이미 늦은 것일까. 일단 내 주변의 고장 난 물건을 고쳐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고치는 게 습관이 되고 자신감이 생기면, 우리는 고장 난 지구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47쪽

2020년에 축제의 캐릭터 ‘치킹’과 ‘치야’가 등장했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소녀 감성을 가진 수탉, 따뜻한 감성의 몸짱 닭’ 치킹. ‘카리스마 넘치는 센 언니 이미지의 여친 닭, 도도하지만 귀여운 맏언니 스타일’ 치야.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우선 우리가 먹는 닭은 모두 암탉이다. 수컷은 병아리 때 감별되어 다른 동물의 사료가 되기 때문에, 애초에 수컷 몸짱 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암탉은 그림처럼 날씬하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고기가 되어야 하는 암탉의 사육 환경에 대한 묘사는 끔찍하다.

54쪽

대구시 전용 서체가 없는 것은 행운이다. 앞선 사례를 참고하고 단점을 보완하면 더욱 명확하게 방향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많은 지자체 전용 서체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 문화를 강조하는 의미 중심의 스토리텔링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가령 2·28민주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민주주의를 서체로 표현한다거나, 중구 근대 골목이 가지는 근대 문화를 시각화한다면 난감한 일이다. 수성못과 앞산, 신천과 팔공산 등의 지리적 요소를 서체에 담아낸다는 것도 무리가 있다. 이런 접근 방식은 결국 지자체장이나 개발자의 의도가 지나치게 담기게 되어 일방향의 무리수를 두는 디자인이 될 공산이 크다.

79쪽

글자는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의 것이다. 어느 국어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자는 ‘민주적’이다. 폰트를 자주 사용하는 북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무료 폰트일수록 더욱 신경 써서 만들어달라는 정도다. 무료 폰트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많은 사람이 공짜라서 쉽게 다운받아 사용하는데, 괴상망측한 폰트를 사용한 문서들은 보기 괴롭다. 대충 만들어서 공짜로 배포하는 것은 말하자면 ‘도둑 정신’이다.

84쪽

비용을 지불해야만 환대받는 공간이 많아질수록 시민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장소는 줄어든다. 햇볕을 쬐는 노인을 위한 공원과 벤치, 스터디카페보다 쾌적하고 멋스러운 공공 도서관, 접근성이 좋고 안전한 산책로, 부모의 소득 차이로부터 자유로운 어린이 놀이터 등을 고민하는 것이 도시 디자인이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으려는 사려 깊은 공공 픽토그램, 저시력자나 휠체어 이용자를 고려한 정보 그래픽도 도시 디자인이다. 우리가 숨을 쉬며 공기를 의식하지 않듯이 복잡한 도시에 살면서 그 무엇도 의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고도의 도시 디자인이다.

135쪽

“What is the common life(보통은 무엇인가요)?” FDSC 회원과 예비 신입 회원 마흔여 명이 모인 제로 웨이스트 숍 더커먼 외벽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문장이다. 끊임없이 자문한다. 무엇이 보통의 삶일까. 그 안에서 오고 가는 ‘특별한’ 대화와 제안, 선언이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성차별 없이, 지역 차별 없이 모두가 자신의 몸짓과 목소리로 멋지게 활동할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자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통’이어야 한다.

174쪽

차례

여는 글. 구부러진 골목길에서

대구(들)
글자를 오래 간직하려는 마음
간판을 보며 우리 삶을 반성하다
아파트와 글자 도시에 대하여
팬데믹과 디지털
고치는 것보다 새것이 더 쉽고 편한 세상의 그림자
제로 웨이스트 숍, 제로 웨이스트 시티
‘무해한 페스티벌’을 궁리한다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대구 그래픽 디자이너와 문화의 운동장
글자의 계절, 시월
도시와 글자: 가장 젊은 도시 전용 서체를 위하여
폰트에 담긴 정신
신신이 디자인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간단한 걸 복잡하게, 복잡한 걸 간단하게, 무엇보다 따뜻하게
기록을 구축하고 도시를 기억하는 독립 출판
독립 출판이라는 ‘작은 돌’
길, 어렵고 외롭고 두려운
북한산의 ‘검은입’과 ‘사자털’
호텔방과 쪽방
담장 허물기와 환대하는 마음
삶의 문화를 살피는 디자인
동대구역 승강장에선 왜 많은 이가 무단 횡단을 할까
디자인과 미술의 관계 맺기
문자화되지 않은 언어, 사투리
디자이너의 이름을 허하라!
헌책이 되고 싶다
아름다운 책 『훈민정음』
한국전쟁과 대구의 그래픽 디자인
편견과 혐오를 떨쳐버리는 디자인
디자이너 세계의 기울어진 운동장
청년들이 살고 싶은 도시는
도시는 책이다
대구에서 디자이너가 멋지게 살아가려면
시골 한옥 민박집에서 보낸 하룻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아름다움

정재완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정병규출판디자인과 민음사출판그룹에서 북 디자이너로 일했다. 거리 글자에 관심을 가지고 2008년부터 개인전 〈글자풍경〉을 네 차례 열었으며, 2018년에는 전시 〈정재완 북 디자인전〉, 2019년 지역 시각 문화를 기반으로 한 〈(북성로) 글자풍경〉 전시를 열었다.

함께 지은 책으로 『세계의 북 디자이너 10』 『전집 디자인』 『아파트 글자』 『디자인된 문제들』 등이 있으며 디자인한 책 『산업의 자연사』가 1회 한솔 인스퍼 어워드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작업의 방식』이 2022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선정되었다. 현재 영남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이자 AGI 회원, 한국디자인사학회 회원,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사진책 출판사 ‘사월의눈’ 북 디자인을 도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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