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개인적인 드레스 코드, 티셔츠
정성껏 다림질한 일흔 장의 인생 앤솔로지
현대미술, 건축, 디자인, 도시 생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명받지 않은 것을 발굴하며 현대사회를 그려내는 베테랑 편집자이자 저널리스트 쓰즈키 교이치가 자신의 유료 주간 메일 매거진 《ROADSIDERS’ weekly》 2015년 7월 8일 호부터 2016년 12월 28일 호까지 매주 연재한 69회의 기사에 티셔츠 한 장을 더해 묶은 이야기, 『버릴 수 없는 티셔츠』가 출간되었다. 동명의 이름으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처음엔 단순히 티셔츠에 얽힌 추억담을 수집하려는 취지였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이야기는 점점 더 깊어지고, 길어지고, 결국 티셔츠는 개인의 삶을 여는 열쇠이자 구실이 되었다.
속옷에서 출발해 제임스 딘과 말런 브랜도가 걸친 반항의 아이콘을 지나, 티셔츠는 누구나 한 벌쯤 있는 일상복이자 중요한 날에 입는 패션 아이템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버릴 수 없다’라고 말하는 대다수의 티셔츠는 누가 봐도 멋지거나 값비싼 브랜드 상품이 아니다. 얼룩지고 색이 바래거나, 유행이 지난 스타일이거나, 혹은 촌스러운 문구가 박히기까지 한 허름하고 괴상한 것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소한 집착이 더욱 선명하게 내밀한 삶의 궤적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 즐겨 듣던 노래, 헤어진 연인과의 행복했던 한때, 인생을 바꾼 만남,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일화,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등이 일흔 장의 옷자락마다 배어 있다.
『버릴 수 없는 티셔츠』는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아는 저명한 작가의 유려한 문장부터 급히 써 내린 티가 역력한 아마추어의 거친 텍스트까지, 날것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에 최소한으로 다듬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이 투박한 정성 덕분에, 각 글쓴이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가지각색의 문체 또한 읽는 맛을 더한다. 보편적인 사물인 티셔츠를 매개로 유일무이한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을 마주하면 삶의 다양성이 가지는 힘을 다시금 실감할 것이다. 또한 일흔 명의 글쓴이 모두 나이, 성별, 직업, 출신지만 기재하고 이름과 얼굴은 밝히지 않았다. 그들이 진솔하게 털어놓는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티셔츠의 주인을 그려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단순히 티셔츠에 얽힌 일화뿐 아니라, 출생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글도 적지 않다. 이를 통해 유명인의 의외의 면모를 발견하거나, 가장자리 아웃사이더의 속사정에 귀 기울여 보자. 켜켜이 쌓인 개인의 인생사를 통해 쇼와 시대부터 헤이세이 시대, 레이와 시대까지 이르는 일본 현대사회의 풍경을 조감할 수 있을 것이다. 티셔츠마다 깃들어 있는 주인의 사적인 취향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다. 음악, 패션, 예술을 비롯한 서브컬처의 역동적인 흐름을 생생하게 담은 기억과 취향의 아카이브를 쇼핑하듯 둘러보자.
멋들어진 티셔츠 카탈로그가 아니라고 선언했을지언정, 잡지 《POPEYE》와 《BRUTUS》를 거쳐 사진집 『TOKYO STYLE』로 컬트 아카이브사에 한 획을 그은 50년 차 편집자 쓰즈키 교이치가 직접 정성껏 다림질하고 촬영한 티셔츠 사진이 뿜어내는 생동감은 패션 잡지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사진 한 장 한 장마다 티셔츠가 누비고 다녔던 시대의 공기가 고스란히 서려 있다. 이들이 페이지를 넘나들며 텍스트를 변화무쌍하게 침투하는 레이아웃으로 펼쳐진다. 글과 사진이 마치 한 유기체처럼 살아 숨 쉬는 구성은 티셔츠라는 기억의 박물관을 구경하는 듯한 체험을 선사할 것이다.
책을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 #捨てられないTシャツ(#버릴수없는티셔츠)를 검색해 보길 바란다. 수많은 사람이 책 밖에서 자신만의 티셔츠와 그 속에 담긴 삶을 공유하고 있다. 누구나 그 일부가 될 수 있는 현재진행형 프로젝트이니, 함께하면 어떨까? 지금 당신의 서랍에도 버릴 수 없는 기억이 접혀 있을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