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성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
미의식이 만드는 미래
지금 일본은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하라 켄야는 이 중대한 시점에 장차 이 나라의 가능성과 긍지를 지켜나가기 위한 효과적인 길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잠재된 가능성과 미래의 행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 혹은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비전을 명쾌하게 그려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미래를 선명하게 그려가는 디자인의 본질이 아닐까.
이 책은 이와나미쇼텐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도쇼(図書)》에 2009년 9월부터 2년 동안 연재한 「욕망의 에듀케이션」을 한데 묶은 것이다. 일본어판에서는 처음 이 책의 제목으로 ‘디자인 입국’이라는 제목안을 내놓기도 했다. 연재 제목이었던 ‘욕망의 에듀케이션’이라는 에두른 표현보다 ‘디자인 입국’이 단연 명쾌했으나, 대나무를 쪼개놓은 것처럼 담백한 이 제목에 하라 켄야는 멈칫했다. ‘입국’이라는 씩씩한 어감에 조금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어판에서는 ‘일본의 디자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이 책이 오랜 전통문화를 논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성분 표시와 같다는 의미에서 ‘미의식이 만드는 미래’라는 부제가 붙었다.
하라 켄야는 이 책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비전’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 너머에는 디자이너라 불리는 이들이 앞으로의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책의 한국어판은 현 사회가 맞이한 향방과, 이 사회의 모든 것들이 디자인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디자인을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아 ‘내일의 디자인’이라는 제목을 채택했다. 하라 켄야는 말한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꾀하는 것이 디자인이고, 그 모습을 떠올리고 구상하는 것이 디자인의 역할이다.” 이 책은 디자인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이야기다. 현재에 안이한 작업에 머무르지 않고 디자인으로 미래를 가상하고 구상하는 작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청소하는 사람도, 공사장 인부도, 요리하는 사람도, 조명을 관리하는 기사도, 모두 성실하고 진지하게 작업한다. 감히 언어로 표현하자면 ‘섬세’ ‘정중’ ‘치밀’ ‘간결’. 이런 가치관이 바탕에 있다. 이는 어디에서도 쉽게 가질 수 없는 가치관이다. 파리에서도 밀라노에서도 런던에서도, 이를테면 전람회 회장 하나만 놓고 봐도 기본적으로 뭔가를 더 낫게, 더 정성스럽게 하려는 의식이 희박하다. 노동자는 정해진 근무시간만 끝나면 하던 작업을 멈춘다. 효율이나 품질을 향상시키려는 의욕보다 자기 형편을 우선시하며, 업무보다 개인의 존엄을 우선시 한다고나 할까. 관리하는 측도 그것을 전제로 적절히 제어하며 업무를 추진한다. 물론 유럽에는 장인 기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일상적인 청소나 전시회장 설치 같은 일은 장인 기질이 미치는 범위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일상적 환경을 정성스럽게 꾸며나가려는 의식은 작업하는 당사자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환경을 공유하는 일반 사람들의 의식 수준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특별한 장인의 영역에만 고매한 의식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흔해빠진 일상적 공간을 제대로 관리하고 사회 전체가 그것을 하나의 상식으로서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것. 미의식이란 그런 문화의 양상이 아닐까. 물건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원은 바로 이 ‘미의식’이 아닐까 하고 나는 요즘 생각한다. 결코 비유나 예시로 하는 말이 아니다. 물건을 만드는 자에게도, 만들어진 물건을 받아서 쓰는 자에게도 공유되는 감수성이 있어야 물건은 그 문화 속에서 육성되고 성장한다. 미의식이야말로 제조를 계속해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원이라고 하면 우선 천연자원을 생각한다. 천연자원이 그다지 없는 일본은 공업 제품을 만드는 고도한 ‘기술’을 연마해왔다. 전후 고도성장은 그러한 구도로 제조를 추진해온 성과다. 세계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전후 일본의 뛰어난 공업생산은 ‘대량생산’, 즉 많은 제품을 균일하게 만드는 것을 매우 안정된 수준으로 달성하는 것이었다. 또 거기에 제품을 소형화하는 응집력 같은 것이 작용하여 공업 제품의 우위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일본의 생산 기술은 양을 전제로 한 품질, 그리고 치밀함이나 응축성을 공업 제품에 구현함으로써 세계로부터 높은 신용을 얻었던 것이다.
야나기 소리가 디자인한 일용품이 조용히 눈길을 모으고 있다. 예를 들면 주전자. 별다를 게 없는 평범한 주전자다. 그러나 자태가 참으로 당당하여, 주전자라면 이래야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설득력이 있다. 주전자의 쓰임새는 단순하다.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가열 기구에 얹어놓는다. 물이 끓어 주둥이에서 김이 오르면 찻주전자나 보온병에 담는다. 야나기 소리의 주전자는 그런 일상적 행위를 자연스레 행하기 위한 도구로서 잘 만들어져 있다. 편하게 잡히는 손잡이, 넉넉한 주둥이 모양은 좋은 의미에서의 둔중함이 있고 안전감을 준다. 땅딸막하니 단단히 자리 잡힌 몸뚱이나 뚜껑의 도톰한 꼴에는 실용적인 미에 철저한 설계자의 성의가 흘러넘치는 듯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하학적이고 실루엣이 선명한 이탈리아제 주전자가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고 시대의 첨단을 개척해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요즘은 오히려 그런 물건들이 더 낡아 보인다. 그것은 결코 레트로 유행이나 리바이벌 붐의 소산이 아니다. 소비 욕구에 휘둘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새로움’을 애타게 찾던 우리의 머리가 조금 냉정을 되찾고 주위와 일상을 찬찬히 둘러보는 여유가 생긴 것은 아닐까. 야나기 소리의 주전자는 앤티크도 아니고 좋았던 옛 시절을 상징하는 노스탤지어의 산물도 아니다. 일상의 행동을 모자람 없이 돕고 있는 지극히 일반적인 공업 제품이다.
머리말
글을 시작하며
이동 디자인의 플랫폼
포화된 세계를 향하여
전람회
이동에 대한 욕망과 미래
심플과 엠프티 미의식의 계보
야나기 소리의 주전자
심플은 언제 생겨났나
아무것도 없음의 풍요
아미슈와 디자인
집 살림살이의 세련
살림살이의 모습
집을 만드는 지혜
무소유의 풍요
집을 수출한다
관광 문화의 유전자
자국을 보는 감식안
겹눈의 시점
아시아식 리조트를 생각한다
국립공원
세토나이국제예술제
미래 소재 사건의 디자인
창조성을 촉발하는 매질
패션과 섬유
계구우후의 크리에이션
해외에서 일본의 미래를 접하다
성장점 미래사회의 디자인
동일본대지진
성숙함의 원리
베이징에서 바라보다
글을 마치며
도판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