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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과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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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지 않은 디자인이 정말 문제인가
디자이너와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 모두에게 질문하는 디자이너

빅터 파파넥은 1971년에 출간된 『인간을 위한 디자인』에서 처음으로 디자이너들의 도덕성과 책임감을 강조했다. 넘쳐나는 무책임한 산업 디자인의 결과물이 낭비를 부추기고, 실제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힌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주장을 기반으로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과 디자이너에게 도덕성과 책임감을 요구한다. 『디자인과 도덕』의 저자 김상규는 그러한 요구를 아예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디자인이 도덕적일 것을 요구하는 수용자와 기꺼이 도덕적 디자인을 하겠다고 나서는 디자이너 모두에게 질문한다. 왜 디자인 업계에만 유독 그런 것을 요구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디자인의 도덕에 대한 여러 현상과 사례들, 기원 등을 차례로 언급하며 왜 디자인이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될 수 없는지, 우리가 진정으로 문제 삼아야 할 점은 무엇인지 하나씩 풀어간다.

편집자의 글

플라스틱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
그런데 그게 제품 디자이너의 잘못인가?

얼마 전, 우리 일상에 작지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부터 커피숍 매장 안에서 커피를 마신다면 일회용 종이컵을 사용할 수 없다. 자리에 앉은 손님에게 종이컵을 주면 벌금을 내도록 법이 개정된 것이다. 모 커피 전문점은 종이 빨대, 빨대가 필요 없는 컵 뚜껑 등으로 일회용 쓰레기를 줄이는 전 세계적인 움직임에서 앞장서고 있다. 이 회사는 재활용 가능한 일회용컵 디자인 공모전에 상금으로 1,000만 달러를 걸기도 했다. 우리나라 정부도 2030년까지 플라스틱 폐기물 발생량을 50% 감축하는 지침을 발표했다. 전 세계적으로 쏟아내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연간 3억 톤이라고 하니, 정부와 다국적 기업의 이러한 목표 설정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많은 쓰레기가 나오는 원인이 잘못된 디자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부 디자이너들은 외부의 이런 질타에 기꺼이 수긍하며 ‘착한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한다. 앞서 언급한 공모전은 양쪽의 뜻이 잘 맞아떨어진 경우다. 이 책 『디자인과 도덕』은 그러한 흐름에 날선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게 정말 디자인의 잘못일까? 디자인만으로 우리 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걸까? 왜 디자인은 꼭 도덕적이어야 할까?

도덕적 디자인의 오랜 역사와 현재
우리가 좋다고 여긴 건 정말 ‘좋은’ 것인가

디자이너에게 도덕을 처음으로 요구한 건 빅터 파파넥이지만,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 활동했던 여러 사상가로부터 왔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 노자(老子)를 비롯해 간디와 윌리엄 모리스, 레이첼 카슨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직업적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윌리엄 모리스처럼 현대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도 있는가 하면, 노자나 간디처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디자인’의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인물들도 있다. 김상규는 이들의 이야기를 디자인과 결부시킴으로써 디자인과 도덕의 관계가 최근 몇십 년 사이에 갑작스레 부각된 것이 아니라 아주 예전부터 그 둘 사이의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논증한다. 그리고 그러한 오래된 요구에 부응한 현대 디자인 활동을 차례로 거론한다. 에코 디자인과 공정무역, 소외 계층을 위한 디자인 등이 대표적이다. 처음엔 선의로 시작된 일들이 정말로 끝까지 선한 영향력만을 미쳤는지, 우리가 고려하지 못했던 부작용은 없었는지, 그것들이 과연 근본적인 해결책인지, 아니면 한낱 미봉책에 불과했는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디자이너에게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오늘의 복잡한 문제를 간편하게 해소하려는 방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013년, 그 이후의 세계
더 이상 선행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는 중요한 변곡점을 여러 번 맞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시작으로 한 재난과 그에 대한 대처, 각종 혐오와 그것에서 기인한 범죄, 노동 문제, 양극화, 이주민 이슈 등은 최근 3-4년 사이에 떠올랐으며 그 파급 효과는 어느 때보다도 크다. 디자인과 디자이너들은 이제 더 이상 문제 해결에 그저 호의만을 베푸는 주변인이 아닌 문제의 당사자가 되었다. 급변하는 시류 속에서 디자이너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선한 의도를 바탕으로 한 활동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디자이너와 디자인 수용자 모두가 사회 안에서 함께 논쟁하고 토론하며 더 좋은 결과를 도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김상규는 그 역시 디자이너로서,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 중 한 사람으로서 착한 생각보다는 열띤 논쟁이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책이 보여줄 수 있는 도덕적 디자인의 얼굴
이것은 과연 착한 디자인인가

『디자인과 도덕』의 표지는 모양새와 질감 모두 다른 도서들과 사뭇 다르다. 우선 책 표지엔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종이가 사용되었다. 마치 회색의 마분지 같은 표지에는 책의 제목과 저자 이름, 출판사명이 쓰여 있지 않다. 대신 정면에 붙어 있는 하얀색 스티커에 제목과 저자 이름은 물론 전체 구성과 색도, 제책 방식, 종이 사양, 가격까지 책 한 권에 관련된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 전문가끼리만 알음알음 주고받던 정보들까지 이 책을 집어든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정보를 솔직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디자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책을 다 읽은 독자에게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할 여지를 주기도 한다. 이 디자인은 정말 착하기만 한 것일까? 책을 덮고 나서도 책을 만져보며 생각하게 만든다.

책 속에서

도덕성이라는 보편적인 방식으로 디자인 활동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갈등 없이 너무나 쉽게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닌가.

「머리말」, 8쪽

문제 해결에 익숙한 디자이너에게는 디자인 행위가 비평적인 작업으로만 끝나는 것이 당혹스러울 수 있다. 디자이너가 어떤 문제에 개입하게 되면 주어진 문제든 발견한 문제든 그것을 해결해서 이전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더 나은’과 ‘문제’가 교육과 직업적인 활동에서 학습된 선입견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래서 정말로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문제는 무엇인지 생각할 여유가 필요하다.

「사례: 오늘날의 주장와 활동 – 도시 빈민을 위하여: 노숙자에 대한 태도」, 42쪽

20세기 후반, 풍요를 경험하는 동안 아름다운 책을 만든 예술가 정도로 가볍게 인용되던 윌리엄 모리스가 사상가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의 생각에 공감하는 것은 어쩌면 모리스가 살던 시대의 고민이 오늘날에도 유효함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환경은 100여 년 전보다 크게 나아지지 못했거나, 진보하기는커녕 그 시대로 뒷걸음친 것이라고 해야겠다. 따라서 노동의 기쁨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원류: 일찍이 그들은 주장했다 – 윌리엄 모리스와 노동의 기쁨」, 60쪽

과연 ‘좋은 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사실은 그게 정상이다. 학습된 선행을 하는 것이 곧 ‘좋은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게다가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은 선한 마음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뿐 아니라 사안을 바라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착한 일을 했으니 결과는 내 알 바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착해야 한다면 현명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논쟁: 도덕적 접근 다시 보기 – 좋은 일을 한다는 것」, 117쪽

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지나오는 동안 흔히 말하듯,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으면서 디자이너들은 제각각 다른 태도를 표명해왔다. 그 와중에 찾은 합의점은 결국 보편적인 인간 정서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마치 디자인이란 ‘그런 것이고’, 그래왔던 것처럼 부담감을 해소한다. 결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결론: 남은 과제」, 142쪽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디자인 전문가든 시민이든 디자인의 주체는 이미 그 변화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이웃의 목소리를 들으며 도덕 담론이 제한했던 틀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희망의 씨앗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존의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라고 해서 이 씨앗이 꼭 개인주의, 집단주의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그 싹은 비평적 담론일 수도 있고 이른바 생활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다. 규모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보론: 2013년 이후의 세계 –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남기」, 181쪽

차례

머리말

서론: 왜 ‘도덕’인가
‘착한’ 것들이 늘고 있다
‘착한 디자인’ 현상
디자인의 도덕성을 따지다
디자인을 향한 비난

사례: 오늘날의 주장과 활동
그린 디자인, 에코 디자인
호혜의 디자인: 나머지 90퍼센트를 위하여
도시 빈민을 위하여: 노숙자에 대한 태도
재난 대응
아이디어 모으기

원류: 일찍이 그들은 주장했다
노자와 디자인의 속성
윌리엄 모리스와 노동의 기쁨
간디와 자급자족 공동체
슈마허와 좋은 노동
레이첼 카슨과 환경운동
버크민스터 풀러와 지식의 총화

논쟁: 도덕적 접근 다시 보기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구를 살린다는 것: 생태학적 접근, 그리고
소비주의 비판
공정하다는 것: 공정무역, 윤리적 디자인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 제3세계를 위한 자선
좋은 일을 한다는 것
지속 가능하다는 것
올바르다는 것: 정치적 올바름과 반자본주의
적고 단순하고 싸다는 것: 미니멀리즘, 노멀리즘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

결론: 남은 과제
아스펜의 교훈,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디자이너에게 책임을?
노동으로서의 디자인
나와 이웃을 위한 디자인
사회적 호감과 디자인의 내면화

보론: 2013년 이후의 세계
그들의 문제에서 내 문제로
재난사회의 삶
혐오사회의 삶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남기

맺음말

김상규

대학과 대학원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인 아카이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퍼시스에서 의자 디자이너로 근무했고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동안 〈droog design〉 〈한국의 디자인〉 〈모호이너지의 새로운 시각〉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한국디자인문화재단 사무국장을 거쳐 지금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디자인학과 부교수로 있다. ‹Droog Design› ‹한국의 디자인› ‹Laszlo Moholy-Nagy› 등의 전시를 기획한 이래 디자인 큐레이팅과 아카이브 연구를 해왔으며 자율디자인랩에서 제작 문화와 한국 디자인에 관한 워크숍 및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어바웃 디자인』 『의자의 재발견』 『사물의 이력』, 번역서로는 『사회를 위한 디자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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