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
그런데 그게 제품 디자이너의 잘못인가?
얼마 전, 우리 일상에 작지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부터 커피숍 매장 안에서 커피를 마신다면 일회용 종이컵을 사용할 수 없다. 자리에 앉은 손님에게 종이컵을 주면 벌금을 내도록 법이 개정된 것이다. 모 커피 전문점은 종이 빨대, 빨대가 필요 없는 컵 뚜껑 등으로 일회용 쓰레기를 줄이는 전 세계적인 움직임에서 앞장서고 있다. 이 회사는 재활용 가능한 일회용컵 디자인 공모전에 상금으로 1,000만 달러를 걸기도 했다. 우리나라 정부도 2030년까지 플라스틱 폐기물 발생량을 50% 감축하는 지침을 발표했다. 전 세계적으로 쏟아내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연간 3억 톤이라고 하니, 정부와 다국적 기업의 이러한 목표 설정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많은 쓰레기가 나오는 원인이 잘못된 디자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부 디자이너들은 외부의 이런 질타에 기꺼이 수긍하며 ‘착한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한다. 앞서 언급한 공모전은 양쪽의 뜻이 잘 맞아떨어진 경우다. 이 책 『디자인과 도덕』은 그러한 흐름에 날선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게 정말 디자인의 잘못일까? 디자인만으로 우리 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걸까? 왜 디자인은 꼭 도덕적이어야 할까?
도덕적 디자인의 오랜 역사와 현재
우리가 좋다고 여긴 건 정말 ‘좋은’ 것인가
디자이너에게 도덕을 처음으로 요구한 건 빅터 파파넥이지만,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 활동했던 여러 사상가로부터 왔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 노자(老子)를 비롯해 간디와 윌리엄 모리스, 레이첼 카슨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직업적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윌리엄 모리스처럼 현대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도 있는가 하면, 노자나 간디처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디자인’의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인물들도 있다. 김상규는 이들의 이야기를 디자인과 결부시킴으로써 디자인과 도덕의 관계가 최근 몇십 년 사이에 갑작스레 부각된 것이 아니라 아주 예전부터 그 둘 사이의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논증한다. 그리고 그러한 오래된 요구에 부응한 현대 디자인 활동을 차례로 거론한다. 에코 디자인과 공정무역, 소외 계층을 위한 디자인 등이 대표적이다. 처음엔 선의로 시작된 일들이 정말로 끝까지 선한 영향력만을 미쳤는지, 우리가 고려하지 못했던 부작용은 없었는지, 그것들이 과연 근본적인 해결책인지, 아니면 한낱 미봉책에 불과했는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디자이너에게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오늘의 복잡한 문제를 간편하게 해소하려는 방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013년, 그 이후의 세계
더 이상 선행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는 중요한 변곡점을 여러 번 맞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시작으로 한 재난과 그에 대한 대처, 각종 혐오와 그것에서 기인한 범죄, 노동 문제, 양극화, 이주민 이슈 등은 최근 3-4년 사이에 떠올랐으며 그 파급 효과는 어느 때보다도 크다. 디자인과 디자이너들은 이제 더 이상 문제 해결에 그저 호의만을 베푸는 주변인이 아닌 문제의 당사자가 되었다. 급변하는 시류 속에서 디자이너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선한 의도를 바탕으로 한 활동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디자이너와 디자인 수용자 모두가 사회 안에서 함께 논쟁하고 토론하며 더 좋은 결과를 도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김상규는 그 역시 디자이너로서,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 중 한 사람으로서 착한 생각보다는 열띤 논쟁이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책이 보여줄 수 있는 도덕적 디자인의 얼굴
이것은 과연 착한 디자인인가
『디자인과 도덕』의 표지는 모양새와 질감 모두 다른 도서들과 사뭇 다르다. 우선 책 표지엔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종이가 사용되었다. 마치 회색의 마분지 같은 표지에는 책의 제목과 저자 이름, 출판사명이 쓰여 있지 않다. 대신 정면에 붙어 있는 하얀색 스티커에 제목과 저자 이름은 물론 전체 구성과 색도, 제책 방식, 종이 사양, 가격까지 책 한 권에 관련된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 전문가끼리만 알음알음 주고받던 정보들까지 이 책을 집어든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정보를 솔직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디자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책을 다 읽은 독자에게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할 여지를 주기도 한다. 이 디자인은 정말 착하기만 한 것일까? 책을 덮고 나서도 책을 만져보며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