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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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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그래픽 디자이너 63팀의 시국선언 시각화 프로젝트

1960년 4.19부터 2024년까지 발표된 ‘시국 선언문’에서 한 문장을 발췌해 포스터로 디자인한 《시대 정신》 프로젝트의 도록이다. 동시대 디자이너 63팀이 각기 다른 관점으로 해석한 시국 선언문 포스터 63작과 함께 디자이너, 큐레이터, 작가, 기자, 문화 비평가의 ‘디자인과 시대 정신’에 관한 글을 실었다.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마다 시민의 목소리를 담아낸 시국 선언문을 12.3 비상계엄 사태를 통과하는 2025년에 다시 소환하며, 현시대 디자이너의 책임과 역할은 무엇인지 묻는다.

편집자의 글

12.3 계엄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2024년 12월 3일 계엄 이후 사회적 불안과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디자이너들은 질문한다. “디자인은 지금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시대정신을 가져야 하는가?” ‘일상의실천’은 이에 대한 답으로 《시대 정신》 전시를 기획했다. ‘일상의실천’은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프로젝트를 통해 디자이너의 역할과 책임을 고민해 온 대표적인 디자인 스튜디오다. 이번 전시는 동시대 디자이너들이 우리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바라보며 만들어낸 비판적이고 사유적인 시각언어를 통해 시대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시대 정신》 도록은 전시를 기록하는 동시에, 디자이너들이 전시에 담고자 했던 메시지, 시대적 고민, 그리고 이들이 느낀 사회적 책임감을 글과 이미지로 실었다. 디자인이 단순한 시각적 표현을 넘어 사회를 바라보는 창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 결과물이자, 디자이너들의 집단적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책 속에서

대한민국은 엄혹했던 군부독재 정권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회적,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며 민주주의의 기틀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 역사적 분기점의 순간마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해 온 시민들이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시국 선언문’이라는 텍스트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 2024년, 다시 한번 역사의 격변기를 지나며, 우리는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마다 시민의 목소리를 담아낸 시국 선언문을 다시 소환하고자 합니다. 《시대 정신》 프로젝트는 특정 정권의 파면을 넘어, 그 이후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민주주의의 모습을 그려 보고자 합니다.

15쪽

대한민국 통치권자의 말이 모두의 말문을 막히게 한 비현실적인 시간. 얼어붙은 새벽을 깨고 나온 건, 그 시간을 함께 목격한 시민들의 말이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한을 남용하며 망가트린 헌정 질서를 지키자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선 사람들의 앞선 목소리가 광장을 열었다. 촛불과 응원봉이 만나 “대통령 탄핵!”을 외쳤다. 모여든 사람들의 다름과 차이를 억누르지 않아 더 크게 울린 외침이었다. 2024년 끝자락에서 2025년으로 이어진 겨울의 광장에서 봄을 기다리며, 작은 발걸음들이 세상에 남길 흔적의 힘을 믿는.

19쪽

“디자이너로서 우리는 정육점 주인보다 대중에 대한 책임감이 덜하다고 할 수 있을까?” 2020년 작고한 밀턴 글레이저Milton Glaser가 스탈린 정권 시절 러시아에서 닭고기에 송아지 고기 라벨을 부착했다는 일화를 언급하며 남긴 말이다. ‘I ♥ NY’로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그는 살아생전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 늘 강조했다. 2005년에는 미르코 일리치Mirko Ilic와 함께 저항 정신이 담긴 포스터를 모은 『불찬성의 디자인』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듬해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이 책 말미에는 디자이너이자 저술가, 교육자인 스티븐 헬러Steven Heller와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인터뷰에서도 그는 “우리(디자이너) 모두가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165쪽

“예술은 문제에 대한 질문이고, 디자인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라는 명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예술가도, 디자이너도,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에 질문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개입의 장치를 고안하며, 관객 혹은 사용자를(그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들이 고안한 전략적 의미의 틈 앞에 불러 세운다. 질문 없는 해결은 있을 수 없다.

173쪽

《시대 정신》에 63팀의 그래픽디자이너가 모였다. 그러나 참여한 모두가 그래픽디자이너라는 점이 이 프로젝트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픽디자이너로서의 책임감만큼이나 강하게 밀려온 그들 자신의 시민 의식이 동참을 종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 실천의 발로는 사회적 지위도, 대의명분도 아닌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이 침탈당한 것에 관한 근원적 공분이다. 이는 오직 당사자일 때만 가능해지는 감정으로, 관망하는 자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종류의 마음이다. 그간 여러 참혹한 인재와 참담한 사회적 사안을 마주할 때마다 공감, 연민, 의분, 질책, 체념을 반복했지만, 이는 거리두기를 기본값으로 한 망각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란 사태와 폭동은 내게도 커다란 당사자성을 부여했다. 나는 틀림없이 모독당했고, 분노, 모멸감, 경멸감, 허망함, 황망함 등의 혼란으로 가득 차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185쪽

2024년 12월 3일 밤, 나는 깊은 산골짜기를 빠져나오는 유일한 빛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국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며칠이 될지 알 수 없는 짐을 대충 캐리어에 욱여넣으며 나는 내가, 그리고 우리가 이것의 이전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어둡고 텅 빈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왜 달려가는 거니. 이 새벽에, 그 먼 곳까지 대체 뭐 때문에 가는 거니. 대답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나는 수많은 숫자 중 하나였고, 그것은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엔 언제나 부족한 것이었다. 나는 그저 부드럽게 떠밀려 가고 있었다. 한 지붕 아래 이어져 온 계보가 나에게 있었다.

206쪽

역사는 광장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는 것일까. 비슷한 형태를 한 역사들은 우리가 그로부터 등을 보이고 멀어지려 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반복되어 떠나가던 우리를 불러 세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건들의 잔해로부터 한 시대를 가늠하고 구분한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광장에 모이거나, 잠들지 못했다. 주변에는 내란성 불면증으로 잠을 설치고 충혈된 눈으로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넘쳐 났다. 잘 잤냐는 말을 묻기가 민망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잘 잤냐고 묻는 것도, 의례적으로 잘 잤다고 대답하는 것도 왠지 모르게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222쪽

차례

시대 정신

연대와 발언
우리는 이 순간을 목격했고,
그 자리에서 함께했으며,
앞으로도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하나 상식적이질 않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퍼뜨리면서
절망과 싸울 것이며 사랑을
지키면서 억압을 깨뜨릴 것입니다.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발언과 연대
시대의 정신, 연대와 발언
동기화된 시대정신
디자인, 격, 식, 관계, 변화,
그리고 리더에 관한 생각
양심 있는 자유
당신과 우리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에게는 계보가 있다
너와 나의 민주주의,
그리고 시대정신
공전하는 시대, 굴절하는 정신
과정으로서의 선언

시국 선언문
연표

권준호

영국 왕립예술대학(Royal College of Art, RCA)에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같은 학교에서 1년간 그래픽 디자인을 강의했다. RCA 졸업 작품이자 타이포그래피 설치 작품인 「Life: 탈북 여성의 삶」이 영국 잡지 『크리에이티브 리뷰』의 ‘2011 올해의 스페셜 초이스’로 선정됐다. 2012년 영국 디자인 위크의 ‘올해의 떠오르는 스타’, 런던 사치 갤러리의 ‘사치 뉴 센세이션 20인’으로 선정됐다. 런던의 반브룩 스튜디오와 와이 낫 어소시에이츠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다. 2013년부터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을 운영하며 동료들과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있다. AGI(국제그래픽연맹) 회원이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시각디자인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런던에서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은 어떻습니까』가 있다.

김어진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 공동대표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부산현대미술관, 녹색연합 등 다수의 문화·예술 기관 및 비영리단체와 협업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일민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등에서 작가로 참여했으며, 2019 국제타이포그래피비엔날레 〈타이포잔치: 타이포그래피와 사물〉의 섹션 큐레이터를 담당했다. 2016년부터 대전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에 출강 중이다. 저서로는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지콜론북, 2015)이 있다. 현재 AGI(국제그래픽연맹) 회원이다.

박수지

독립 큐레이터. 큐레토리얼 에이전시 뤄뤼(RARY)를 운영하며, 기획자 플랫폼 웨스(WESS)를 공동 운영한다. 부산의 독립문화공간 아지트 큐레이터, 미술문화비평지 『비아트』 편집팀장, 《제주비엔날레2017: 투어리즘》 코디네이터, 통의동보안여관 큐레이터, 《2024부산비엔날레: 어둠에서 보기》 협력큐레이터로 일했다. 시대에 따라 예술의 근본 속성에 관한 이해가 변화하는 양상에 관해 질문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봉성창

2005년 경향게임스에서 게임 전문기자를 시작으로, 지디넷코리아 산업팀장, 씨넷코리아 편집장을 거치며 IT 전문기자로, 매일경제TV 산업팀장과 비즈한국 산업팀장을 거쳐 경제 전문기자로 전문 영역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2017년부터 비즈한국에서 개최하는 ‘브랜드비즈 컨퍼런스’를 기획 총괄하며, 기업의 브랜딩 및 디자인 전반에도 관심이 많다.

안병학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타이포그래피적 토대에서 디자인과 주변 영역이 만나는 경계를 탐험한다. 시각문화 실험집단 진달래 멤버로 활동했고, 개인전 〈조각의 나열 혹은 구경거리〉(2014)와 〈Juxtaposition〉(2013)을 열었으며, 〈5회 타이포잔치: 몸과 타이포그래피〉(2016-2017), 〈1회 공공디자인페스티벌 주제전시: 길몸삶터〉(2022), 〈디자인코리아〉(2024) 총감독을 지냈다. 코르푸스(Corpu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디자인을 가르친다.

양다솔

작가이자 비건 지향인이며, 글쓰기 공동체 ‘까불이 글방’의 지기이다.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 아무튼, 친구』 『적당한 실례』 등을 썼다.

최명환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편집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디자이너로서 인문학적 소양을 쌓고자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 진학했다가, 디자인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일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다양한 매거진에 객원으로 참여하며 2013년 월간 『디자인』 기자로 정식 합류했고, 지금까지 디자인 전방위에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2021년부터 월간 『디자인』 편집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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