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디자인계의 2000년대는
유령들의 시대였다
“역사적 사건은 쉽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 『디자인의 유령들』은 존재하지만 명확히 붙잡히지 않는 흔적들, 역사의 파편들을 기록한다. 구체적이고도 분명하게 디자인과 사회, 권력, 제도의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는 사건들과 현상들, 그러나 그 의미와 영향은 시장이나 언론의 서사에 미처 온전히 담기지 못한 채 유령처럼 부유해 온 것들 말이다. 저자 오창섭은 이 책에서 지난 20여 년간 한국 디자인계의 선명한 전환점들을 따라가며 한국 디자인사의 풍경을 바꿔온 유령들의 궤적을 추적했다.
책은 세 개의 부로 나뉜다. 먼저 1부 ‘디자인 문화의 유령’은 디자인이 제도화된 ‘문화’라는 틀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리를 잡고 해석되기 시작했는지를 따라간다. 디자인은 어느 순간부터 예술이나 기술, 산업을 넘어 ‘문화’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명확한 신체를 가지지 못한 새로운 영혼”이었다는 점에서 디자인 문화의 유령성을 찾을 수 있다. 1장에서는 가상 질문자와의 대화를 통해 디자인 문화 담론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설명하며, 이는 기존의 산업 중심 디자인 이해에 균열을 낸 시도였음을 밝힌다. 2장은 IMF 이후의 국가적 위기와 문화산업 진흥이라는 기치 속에서 디자인이 일종의 구제책처럼 떠오른 가운데, 디자인이 문화관광부의 정책 대상이 되고 ‘디자인미술관’이라는 제도적 장치로 구현되며 단순한 시각물에서 벗어나 ‘문화적 실천’으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을 추적한다.
여덟 개의 장 중 네 장을 차지하는 2부 ‘공공 디자인의 유령’은 제도와 권력, 사회적 파장과 한층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공공 디자인의 유령성은 “공적 영역이라는 새로운 땅에서 생명 연장을 꿈꾸는 기존 디자인의 가면으로 존재했다”는 점으로, 여러 복잡한 얽힘 속에서 ‘공공 디자인’은 일종의 공적 역할을 부여받았고, 이는 도시와 삶의 공간에 디자인이 개입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놓았다. 3장은 2001년 전시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을 중심으로 공공 디자인 개념의 회집체가 형성된 계기를 살핀다. 4장에서는 그 시절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억할 만큼 크게 논란이 되었던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 사건이 어떻게 관심을 끌고 공공 디자인을 국가 정책 키워드로 만들었는지 다룬다. 5장은 국내 최초의 공공 디자인 공모전인 ‘2006 대한민국 공공디자인대상’을 통해 공공 디자인 개념이 정책과 제도로 구체화하며 이후 정책의 방향을 결정짓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6장에서는 디자인서울을 돌아보며 ‘도시 경쟁력’이라는 이름 아래 디자인이 다시 상품 논리로 회귀, 혹은 퇴행한 것은 아닌지 비판적 시각을 제공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도시 미관에 의아했던 사람이라면 이 장을 읽고 의문이 풀릴 것이다.
3부 ‘작가주의 디자인의 유령’은 두 개의 장이 한 쌍을 이루도록 구성되어 있다. 디자인계에서 ‘작가주의’로 묶여 온 현상들은 특정 세대의 이야기로 축소되곤 했으나, 저자는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을 차용해 그것이 그저 현상이 아닌 “전통적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존재 방식으로부터 이탈하는 움직임”이라고 작가주의 디자인의 유령성을 역설한다.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에 얽힌 신화를 해체하는 데 집중한 7장에서는 그 현상을 특정 세대의 산물이나 영웅 서사로 고정하려는 움직임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그 서사에서 배제된 다양한 몸짓을 역사에 복원하고자 한다. 이어지는 8장은 “어떤 현상을 만들어낸 주체를 인간으로만 한정하는 게 타당한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작가주의 디자인을 꽃피운 배경, 즉 구조를 탐색하며 7장에서 언급한 신화에 대안적 이해를 제시한다.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도는 유령들
그들에게 응답하는 것의 의미
『디자인의 유령들』은 그저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해 나열한 책이나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의 궤적을 읽어내고 디자인의 방향을 결정지었던 흔적을 섬세하게 복원하는 비평적 실천이며,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발 딛고 있는 현재가 어떤 조건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묻고 우리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표면에 큼직하게 드러난 대표적 사건과 현상만으로 역사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여기의 디자인을 이해하고 (그것이 어떤 미래든) 나아가려면 뒤편을 맴도는 과거를 먼저 마주해야 한다.
저자 오창섭 역시 이 책을 쓴 이유를 “잊기 위해, 이동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살아 있음을 확인받기 위해 쓴” 것이라고 밝힌다. “잊지 않으면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동하지 않는다는 건 멈춰 있다는 것이고, 멈춰 있다는 건 죽음의 표식이다.” 유령은 죽었으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같은 곳을 맴돌며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죽은 산 자”다. 그들을 온전히 보내주기 위해, 즉 잊기 위해 오창섭은 이 책에서 “흔적의 신음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꿔 노래하는 영매”로서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한 것이다. 영매의 노래를 통해 오늘날 디자인을 다시 보았을 때, 우리도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