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 실험정신이 남긴 가장 급진적인 유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전례 없는 격변의 시기를 맞았다. 급격한 기술 발전과 산업화로 삶의 구조가 바뀌고, 예술의 역할 역시 근본적으로 재정의되었다. 사진기와 영화, 인쇄 기술, 기계 생산이 일상의 감각을 바꾸어놓자, 예술가들은 더 이상 붓과 캔버스만으로는 세계를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해 세운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공예, 건축과 산업 기술을 결합해 “예술과 삶의 통합”을 실험한 학교였다. 공방과 강의실의 경계가 사라지고, 예술가와 기술자, 장인과 디자이너가 함께 새로운 형태의 ‘생활 예술’을 탐구했다.
모호이너지는 이 실험의 선두에 섰다. 바우하우스 교수로 일하며 사진, 영화, 타이포그래피, 금속 조형 등 신매체를 교육에 도입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지각과 사고를 확장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특히 그가 제시한 포토그램(photogram) 실험은 카메라 없이 빛과 물체의 관계를 탐구한 혁신적인 시도로, “눈으로 생각하고, 손으로 사유하는” 감각 훈련의 핵심이었다. 그는 예술을 표현이 아닌 실험의 한 과정으로, 작품을 결과가 아닌 사고의 도구로 보았다. 그가 강조한 “새로운 시각(new vision)”은 곧 새 시대에 걸맞은 새 인간이 되기 위한 시각 훈련이었으며, 예술이 기술과 함께 인류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 수 있는 사회 변혁 도구라는 믿음의 산물이었다.
학교를 실험실로, 교육을 예술로
1933년, 나치 정권의 탄압으로 바우하우스는 강제 폐교되었다. 예술과 기술의 통합, 자유로운 교육과 실험을 지향한 그 정신은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졌다. 1937년, 모호이너지는 바우하우스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의 초청으로 미국 시카고로 건너가 ‘뉴바우하우스(New Bauhaus)’의 교장으로 초대되었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이상을 산업화된 미국 사회에 맞게 확장해, 학교를 “새로운 인간을 위한 실험실”로 만들고자 했다. 예술과 기술이 상호작용하는 환경 속에서 교육은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아니라 감각을 재조직하고 사고를 훈련하는 과정이었다.
뉴바우하우스는 재정난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지만 모호이너지는 곧 시카고에 ‘디자인학교(The School of Design)’를 세웠고, 이 학교는 훗날 ‘시카고 디자인학교(The Institute of Design)’로 발전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디자인 교육기관인 일리노이공과대학교 디자인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회화나 조각 같은 전공 구분 대신 손과 눈, 감성과 이성을 함께 훈련하는 통합적 교육을 중시했다. 학생들은 손 조각, 촉각 구조, 빛 변조기, 광음향 실험 등을 통해 재료와 감각의 관계를 탐색했다. 바우하우스의 공방이 산업사회의 디자인 실험실이었다면, 시카고 디자인학교는 인간 감각의 실험실이었다. 오늘날 많은 디자인 대학이 강조하는 ‘창의적 사고’ ‘통합적 학습’ ‘프로토타이핑과 실험’은 모두 그가 제시한 교육철학에서 비롯됐다.
세상을 관계 속에서 인식하는 힘,
‘움직이는 시각’
이 책의 핵심 개념인 ‘움직이는 시각(vision in motion)’은 고정된 시점을 벗어나 세계를 관계와 변화 속에서 인식하는 힘을 말한다. 모호이너지는 지각이 눈의 기능을 넘어 사고와 감정, 사회적 맥락이 맞물린 통합적 작용이라고 보았다. 포토그램과 키네틱 조각, 빛 변조기, 추상 영화 등에서 나타나는 움직임을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로 다루고, 빛과 시간, 사물과 감정이 교차하는 과정 자체를 예술의 주제로 삼은 것이다.
즉 ‘움직이는 시각’은 감성과 이성, 예술과 기술, 사물과 인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망을 감지하는 새로운 감각 훈련이다. 이 책에서 모호이너지는 예술을 통해 인간이 세계를 ‘움직이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움직이는 시각’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미지와 데이터, 인간의 감각과 판단을 대체하는 인공지능이 범람하는 이 흐름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모호이너지가 말한 숙제를 마주하고 있다. 사물을 보는 법을 바꾸는 일, 관계 속에서 사유하는 일, 그리고 기술의 속도 속에서 인간의 고유한 감각을 훈련하는 일. 바로 이것이 모호이너지가 굳게 믿은 예술과 교육이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이고, 『모호이너지의 움직이는 시각』이 훌륭한 고전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