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그라픽스

초예술 토머슨

超芸術トマソ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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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이 도시를 떠돌고 있다,

‘토머슨’이라는 유령이…

도시에 유령이 나온다. 이 책 『초예술 토머슨』의 제목은 그 유령에 저자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붙인 이름이다. 그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만 가능한 ‘순수 계단’, 열 수 없도록 꼼꼼히 막힌 채 존재하는 ‘무용 문’, 문도 창문도 없는 벽에 홀로 남은 ‘차양’, 아무도 출입하지 못할 높이에 달린 ‘고소(高所) 문’……. 하나같이 건물이나 거리에 부착되어 있고,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고, 쓸모없다. “분명하게 이야기하겠다. 이것은 ‘초예술!’이라는 것이다.” 모든 물건이 유용한 것과 쓰레기라는 2대 진영으로 나뉜 세상에서, 저자를 포함한 각지의 토머슨을 관측하는 사람들 ‘토머스니언’은 둘 중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못한,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아내 보고한다. 그들의 기록을 통해 ‘초예술 토머슨’의 전모가 낱낱이 밝혀진다.

편집자의 글

거리 산책에 새로운 즐거움을

표현의 세계에는 신선한 충격을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초예술 토머슨’은 저자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명명한 개념예술이다. 더 이상 쓸모가 없지만 건축물에, 또는 길바닥에 부착되어 그 환경의 일부로 보존된 구조물이나 그 흔적으로, 그 자체로 예술을 초월하는 예술이라며 ‘초예술’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초예술이라는 표현의 범위가 너무 넓기에, 상술한 특정 물건에 초점을 맞춘 명칭 ‘토머슨’은 한 야구 선수의 이름에서 따왔다. 고액 연봉을 받으며 입단했지만 헛스윙만 이어가며 끊임없이 삼진을 쌓는데, 구단에서는 “돈까지 들여가면서 정성스럽게 보존”하는 모습이 살아 있는 초예술이라는 이유로.

다소 짓궂은 이름이고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 ‘토머스니언’은 진지하다. 진지하게 거리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건물의 위아래를 꼼꼼히 기웃거리면서, 도시의 틈새를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진지하게 자기가 관측한 물건이 토머슨인지 아닌지 추론하고, 양식을 갖춘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토머슨 이야기를 연재하는 잡지 《사진시대》에 제보한다.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다른 사람의 보고를 읽기만 하지 말고, 여러분도 보고해야 한다”고 종용하거나 “보고가 여기에 게재되면 현금을 지불하겠다”고 회유하거나 심지어 토머슨을 찾지 않으면 독자를 잘라버리겠다고 협박한다. “내가 이 연재를 그만두면 독자 전원이 잘리는 셈이니까.” 물론 그 또한 토머스니언이기에 가뭄에 콩 나듯 보고서를 쓴다.

토머스니언은 웅장한 마천루, 버젓이 전시된 조형물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더라도 이들이 중요시하는 건 그 규모나 한눈에 들어오는 보편적 아름다움 같은 게 아니다.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칠 만한 것, 그늘져 어두운 곳에 있는 것, 애써 가려 놓은 것,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위화감을 자아내 눈에 띈 것, 그런 궁상맞은 구석이 있는 것들을 굳이 주목한다. 사실 토머스니언에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건 아니다. 초예술 토머슨을 찾아다니는 사람, 그리고 그런 것을 발견하면 떨리는 가슴을 안고 찰칵찰칵 사진을 찍는 사람은 누구나 토머스니언이라고 해도 좋다.

흘러가는 대로 가다가 닿은 곳에서

토머슨은 탄생했다가 사라진다

최초로 초예술 토머슨의 개념을 전개한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이것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저 그 개념의 세부를 계속 주물거리고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노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기묘한 형태로 시대나 전체를 역조명”한다. 이 책의 해설을 쓴 건축가 후지모리 데루노부의 말처럼 “그렇다 쳐도 본인은 전체를 볼 목적으로 세부부터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저 세부가 재미있으니까 어린아이처럼 주물거렸는데 그런 꼬임이 가끔은 전체에서 보면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초예술 토머슨은 후일 노상관찰학으로 발전한다. 노상관찰학회는 노상을 관찰하는 모임이다. 토머슨 관측도, 노상 관찰도 앞만 보며 빨리 걸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느리게 걷고, 지루하더라도 집요하게 관찰해야 작고 세세한 것들을 살필 수 있다. 그것만 할 수 있다면 토머스니언이나 노상관찰자를 자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느긋하게 산책하기도 어렵거니와 무용한 건 아무도 모르는 새 버려지기가 일쑤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이다. 지금 거리로 나서야 한다. 이왕이면 한 손에 들기 좋게 만든 이 책을 붙잡고 느리지만 진지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닿은 곳에서 막 탄생했음에도 사라지기 직전의 토머슨이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책 속에서

예술은 예술가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만든다. 하지만 이 초예술은 초예술가가 초예술이라고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무의식중에 만든다. 따라서 초예술에는 어시스턴트는 있어도 작가는 없다. 그저 거기에 초예술을 발견하는 자만 존재할 뿐이다.

「거리의 초예술을 찾아라」, 27쪽

토머슨은 침묵의 존재다. 그 침묵은 보는 이의 가슴을 때린다. 깊은 울림을 준다. 일본에 있던 토머슨 선수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무표정으로 끈기 있게 헛스윙을 이어가던 그 침묵, 우리는 거기에서 깊은 울림을 받았다. 그리고 침묵의 야구방망이가 가슴을 크게 때렸다.

「토머슨을 쫓아라」, 34–35쪽

초예술 물건은 모두 아슬아슬하다. 그 구조가 조금만 빗나가도 평범한 쓰레기, 평범한 장식, 평범한 예술 등 평범하고 당연한 세계에 속하게 되는데 아주 작은 부분이 이유가 되어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초예술로 존재하게 된다.

「하늘을 나는 부인」, 89쪽

사실 초예술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먼저 그 물체를 앞에 두었을 때 가슴이 떨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고찰해 가면서 어떤 도구도, 부동산도, 예술도 아니어서 결국 초예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 되어야 제대로 된 방식이다.

「버섯 모양 원폭 타입」, 199쪽

한 가지 당부할 말은 토머슨을 감상할 때는 토머슨 물건의 환경을 해치지 않도록 주의했으면 좋겠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스치듯이 지나가면서 물건을 넌지시 보는 것이다. 그 집에 사는 주민에게 “이거 뭔가요?” 하고 경솔하게 묻는 일만큼은 피하자. 그 물건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인에게 안겨주면 귀중한 토머슨 물건이 철거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혹은 반대로 주인이 그것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해 사람들이 더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저속한 가공을 한 나머지 결국 단순한 장식 물건으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화려한 파울 대특집」, 298–299쪽

토머슨이라는 건 거의 섬뜩하다. 대부분 세상의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으므로 토머슨을 발견하는 일은 사체를 발굴하는 일과 같다. 가끔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유는 거기에 영적인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건물의 영혼이랄까, 공간의 영혼이다. … 우리가 토머슨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도 이 죽음에 대한 흥미일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분산되어 옅어지면서 공포가 흥미로 바뀌어 간다.

「조용히 숨 쉬는 시체」, 320–321쪽

토머슨이라고 하긴 했지만, 도시 안에서 찰나의 뒤틀림을 본 것일 뿐이다. 뒤틀린 빛은 다음 찰나에 도시 여기저기에 가라앉는다. 도시는 그 안쪽에 쌓이는 뒤틀린 토머슨을 끌어안는다.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이 대자연 안으로 질퍽질퍽 빠져들어 간다. 도시라는 물건은 대자연에 인류가 발생시킨 일시적 현상이며, 언젠가는 붕괴해 다시 대자연 속에 묻힌다.

「토머슨, 대자연으로 가라앉다」, 371쪽

이번 달은 중국의 토머슨을 소개한다. 그렇다고 만리장성을 능가할 만한 것은 아니다.

「중국 토머슨 폭탄의 실태」, 461쪽

우리는 자연이 부여해 준 호기심에 몸을 맡기고 물건을 발견해 왔다. 자연이란 그런 것이다. 호기심 표출을 꺼리며 아무것도 접하지 않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는 어차피 자연 앞에 반드시 무릎을 꿇을 텐데. 그렇게 될 바에는 자연을 꾀어내 함께 시시덕거리는 게 더 재미있다. 유쾌하다.

「사랑의 도깨비기와」, 518쪽

지금까지 세상은 인류가 돌덩이를 쥐고 도구로 사용해 온 이래 물건은 도움이 되는 것과 도움이 되지 않는 것, 두 종류밖에 없다고 굳건하게 믿어왔다. 도움이 되는 것은 방망이나 계단이나 담이나 전신주 등 반드시 이름이 있었다. 그것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게 되면 이름은 사라지고 싸잡아서 쓰레기로 취급되었다. 즉 세상은 유용한 것과 쓰레기, 2대 진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 분명 토머슨 물건은 유용의 진영에서 버려졌지만, 쓰레기의 진영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그 중간 지대를 떠돌았다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다.

후지모리 데루노부, 「겐페이 옹과 토머슨의 위업을 기리며」, 544–545쪽

차례

여는 글

1부
거리의 초예술을 찾아라
토머슨을 쫓아라
이층집의 인감
하늘을 나는 부인
빌딩에 잠기는 거리
바보와 종이 한 장 차이의 모험
토머슨의 어머니, 아베 사다
군마현청의 토머슨
다카다의 바바 트라이앵글
버섯 모양 원폭 타입
어른의 계단
6분의 1 전신주
신형 양철 헬멧 발견!
파리의 반창고
화려한 파울 대특집
조용히 숨 쉬는 시체
아베 사다의 잇자국이 있는 동네
토머슨, 대자연으로 가라앉다
1부 맺는 글

2부
도시의 종기
제5세대 토머슨
콘크리트제 망령
목숨 걸고 서 있는 시체
중국 토머슨 폭탄의 실태
익명 희망의 토머슨 물건
벤치의 배후 영혼
사랑의 도깨비기와
2부 맺는 글

해설 겐페이 옹과 토머슨의 위업을 기리며
역주

아카세가와 겐페이

1937년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현대미술가, 소설가로 무사시노미술대학교 유화학과를 중퇴했다. 1960년대 전위예술 단체 ‘하이레드센터(High Red Center)’를 결성해 전위예술가로 활동했다. 이 시절 동료들과 도심을 청소하는 행위예술 〈수도권 청소 정리 촉진운동(首都圏清掃整理促進運動)〉을 선보였고, 1,000엔짜리 지폐를 확대 인쇄한 작품이 위조지폐로 간주되어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아사히저널》과 만화 전문 잡지 《가로(ガロ)》에 「사쿠라화보(櫻画報)」를 연재하며 독자적 비평을 담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약했다. 1981년 ‘오쓰지 가쓰히코’라는 필명으로 쓴 단편 소설 「아버지가 사라졌다(父が消えた)」로 아쿠타가와류노스케상을 받았다. 1986년 건축가 후지모리 데루노부, 편집자 겸 일러스트레이터 미나미 신보와 ‘노상관찰학회(路上観察学会)’를, 1994년 현대미술가 아키야마 유토쿠타이시(秋山祐徳太子), 사진가 다카나시 유타카(高梨豊)와 ‘라이카동맹(ライカ同盟)’을, 1996년 미술 연구자 야마시타 유지(山下裕二) 등과 ‘일본미술응원단(日本美術応援団)’을 결성해 활동했다. 2006년부터 무사시노미술대학교 일본화학과 객원 교수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노인력』 『센노 리큐』, 공저로는 『일본미술응원단』 『교토, 어른의 수학여행』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책을 남겼다. 국내에 소개된 책은 『초예술 토머슨』 『침묵의 다도 무언의 전위』 『신기한 돈』 『나라는 수수께끼』 『사각형의 역사』와 공저서 『노상관찰학 입문』 등이 있다. 2014년 10월 26일 일흔일곱의 나이로 타계했다.

서하나

건축을 공부하고 인테리어 분야에서 일하다가 직접 디자인하기보다 감상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깨달았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외어전문학교에서 일한통번역 과정을 졸업하고 안그라픽스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현재는 언어도 디자인이라고 여기면서, 일한 번역가와 출판 편집자를 오가며 책을 기획하고 만든다. 『토닥토닥 마무앙』 『초예술 토머슨』 『저공비행』 『느긋하고 자유롭게 킨츠기 홈 클래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은 안그라픽스에서 발행하는 웹진입니다. 사람과 대화를 통해 들여다본
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