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주변화된 이들의 목소리를 증폭하고
행동을 끌어내는 그래픽 디자인의 힘
대다수 분야가 그렇듯 디자인계의 롤 모델도 백인 남성 중심이다. 이 점에 의문을 느낀 페라 카페이와 발렌티나 베르가라가 여성 디자이너에 관한 전시를 기획하면서 이 책 『엑스트라 볼드』의 아이디어가 싹텄다. “시작은 페미니즘 책이었지만 훨씬 넓은 범위를 아우르게 되었다.” 책에는 수많은 컨트리뷰터가 등장해 각자의 경험에 기반한 목소리를 낸다. “시스젠더,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젠더퀴어, 젠더 뉴트럴, 논바이너리” 그리고 “장애, 다양한 인종적·민족적 배경, 서로 다른 수준의 경제적·사회적 특권을 가진 이들”이다. 어떨 땐 비슷한 의제를 말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분명한 건 이들 모두 배제 시스템이 주변부로 밀어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가 “백인, 마른 체형, 남성, 젊은, 이성애자, 기독교인, 경제적으로 안정된”이라는 조건을 하나씩 충족하지 못할 때마다, 그는 조금씩 주변으로 밀려난다.
책은 ‘이론’ ‘역사’ ‘일’ 크게 세 챕터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챕터인 이론은 세계 각지의 사람들 간 차이를 억누르고 특정 집단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에 투쟁하고, 규범 바깥의 대안적인 관점과 방법론에 눈을 돌리도록 안내한다. 첫 글 「페미니즘」에서 엘런 럽턴은 페미니즘을 “서로 다른 젠더의 사람들 사이 평등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미국에서 페미니즘이 논쟁의 대상이었던 역사를 설명한다. 예컨대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인종 평등과 성평등을 분리하고 유색인 여성을 배제했으며, 이런 관점을 거부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으로부터 ‘교차성’ 개념이 나왔다. 엘런 럽턴은 사라 아메드의 글을 인용해 행동에 관한 일련의 이상이나 규범을 채택하기보다, 페미니즘을 실천으로 규정하는 데서 시작할 것을 촉구한다.
시인이자 운동가인 프랜시스 엘런 왓킨스 하퍼가 기틀을 마련한 교차성은 이 책에서 가장 주요하고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개념이다. 다양성을 포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느 하나의 주장만을 관철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다. “특정 순간에 우리는 어떤 정체성을 다른 정체성보다 더 강하게 경험할 수 있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현장에 관한 제니퍼 터바이어스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이렇게 다수의 정체성이 존재하는 가상의 교차로를 시각화해 보여준다. 혹자는 다양한 인종이 한데 모인 미국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냐고 하겠으나, 현대 한국도 더는 ‘단일민족’을 고집할 수 없다. 임금 격차는 여성과 남성뿐 아니라 LGBTQIA+와 비성소수자 사이에도 존재하며, 장애인 차별 및 연령 차별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일어난다. “포용적인 디자인은 다양한 정체성, 배경,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손에서 탄생”하고, 우리의 실천, 즉 생각과 행동에는 폭넓은 시야가 수반되어야 한다.
두 번째 챕터인 역사에서는 간과된 인물과 실천의 성취를 연구한다. 역사는 선별적으로 기록되고 전승되며, 공식 역사는 한 사회의 가장 눈에 잘 띄고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추곤 한다. 예를 들면 샤를로트 페리앙은 빼어나게 멋진 가구의 주요 작가였지만, 페리앙을 무시했으면서도 그가 디자인한 가구는 자기 이름으로 출시한 르코르뷔지에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엘리베이터, 경사로, 폐쇄 자막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가 편리하게 누리는 것들은 모두 장애공동체가 변화를 수없이 요구한 덕분에 얻은 것이다. 아넬리제 엘자 프리다 플라이슈만이 현대 예술가 아니 알베르스가 되기까지 어떤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 어떤 위험을 감수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인도에서 여성이 정치 포스터 디자인에 열렬히 참여해 왔다는 사실을 알면, 그동안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가 얼마나 서구 강대국 위주로 쓰였는지 인지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주목한 부분은 우리 모두에게 어떤 식으로든 권력이 생긴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권력을 자각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바로 “각 개인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다른 목소리를 증폭하고 불공평의 패턴을 교란하는 데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서술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일은 권력의 한 형태다.” 디자인이 비교적 신생 분야라는 것은 어쩌면 다행이다. 디자인의 역사는 주로 현업 디자이너를 비롯한 업계인에 의해 쓰이며, 동시대의 디자인을 실천하고 재정의하는 이들이 한층 포괄적인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앨프리드 H. 바 주니어의 다이어그램을 차용한 행크 윌리스 토머스의 작업과 폴리모드의 타임라인은 각각 1960년에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인 콩고의 역사와 사상, 박해, 항쟁이 형성해 온 퀴어의 역사를 보여준다.
세 번째 챕터는 일로 이 책의 절반가량을 이루며 디자이너가 일하는 다양한 방식을 들여다본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직업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한다는 말마따나 이 챕터는 그 분량만큼 매우 중요해 보이고 실용적이리라는 기대를 준다. 물론 성공적인 프레젠테이션 준비하기, 퇴사할 때나 해고당했을 때의 전략, 커버 레터 쓰는 방법 같은 조언은 일반적으로 유용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커리어는 직업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직장 내 차별에 대응하기, 직장에서 커밍아웃하기, 돌봄 노동이나 감정 노동처럼 비가시화된 노동 해결하기 등의 도움말을 여느 직무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회에 첫발을 디딘 인턴부터 리더의 자리에 오른 전문가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인터뷰와 기고문으로 참여했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직업과 직장은 거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디자이너와 예술가는 직장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인 경우가 많다. 또한 직장에서 말하기엔 어려운 내용이라 외부 프로젝트를 통해 구현할 때도 있다. 무엇보다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어떤 일들은 보수가 없다.” 책 속의 다양한 목소리가 공유해 주는 경험은 우리가 직장을 찾거나 작업에 임할 때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를 늘려주기도 한다. 관리자의 위치에 있다면 다양성을 고려해 채용하고, 직장에 심리적 안전감을 조성하고, 협업자들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마음을 후하게” 쓰기를 권한다. 다양성의 실현은 인재 풀의 넓히고 프로젝트, 나아가 팀 전체의 성패를 좌우하며 “다양성이 디자인 업계에 가져다주는 실제적인 이득”도 분명히 존재한다. “변명을 멈추고 변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다.”
정치, 사회, 문화, 어느 방면으로나 나쁜 소식은 매일 매 순간 들려오는데 좋은 소식은 드물게 전해지는 것 같다. 세상은 갈수록 나빠지고, 더 이상은 희망이 없고, 이런 세상에서 개개인의 존재는 한없이 미약하고 흩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다시금 상기하건대 이 책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는 권력이 있고, 힘이 있다는 것이다. 레슬리 시아에 따르면 “그래픽 디자인은 격정적이고 행동 지향적인 이미지를 창작할 힘이 있다.” 행동하고자 하는 이는 혼자가 아니다. “공동체와 손을 맞잡으며 영향을 미치고, 힘을 실어주고, 변화를 촉발할 수 있다.” 우리는 주변화된 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우리가 주변으로 밀려났을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변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다양성을 개선하고, 포용성을 구축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