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형태라도 책이 될 수 있다면
디자이너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왜 오늘날의 책 디자인을 말하는데 얀 치홀트와 그의 책이 다시 불려 왔는가. 그의 책이 나온 이후 여러 분야에 기술적인 변화가 있었음에도 “치홀트가 명료하게 분석했던 근본적인 요소들, 즉 ‘텍스트’와 ‘이미지’는 여전히 그대로”다. 결국 진정한 고전이란 어느 시대에든 시의적이기 마련이다. “책의 형태는 수 세기에 걸쳐 크게 변하지 않았”고 여타 디자이너가 말하듯 그의 관점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다만 “무엇을 하든 모든 책은 결국 책처럼 보”인다는 건, 반대로 그 어떤 형태라도 결국 책이 될 수 있다는 말로도 읽힌다. 실제로 많은 디자이너가 ‘책의 형태’에 도전했으나 책은 그 결과물이 좋든 나쁘든 여전히 책이었다. 이제 책 디자인의 기본으로 돌아가 치홀트의 그 책을 향한 관심을 다시 촉발하고 싶은, 동시에 최근 디자인계에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게 ‘책의 형태’ 콘퍼런스다.
카트린 드 스메는 르코르뷔지에를 건축가가 아닌 ‘책 디자이너’로서 살펴본다. 르코르뷔지에는 대략 서른다섯 권의 책을 만들었고 집필만 한 게 아니라 전반적인 디자인과 제작까지 주도했다. 현대 건축의 거장이 책 디자인에는 어떻게 접근했는지, 책 작업을 통해 구현하려 한 현대성을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할지 논의한다. 제임스 고긴은 주로 예술가의 책을 다루는 디자이너가 주어진 재료를 해석할 때 빠지는 ‘해석의 유혹’을 말한다. 이상적인 사례가 바로 미국 예술가 고든 마타클락에 관한 책들이다. 어디까지가 참조고, 어디까지가 모방인가? 그 자신을 포함한 현대 디자이너에 대한 재치 있는 비판에, 사려 깊은 결론이 이어진다. 예니 에네크비스트, 롤랑 프뤼, 코리나 노이엔슈반더는 1946년, 1947년, 1948년의 ‘가장 아름다운 스위스 책’을 다시 제시한다. 모종의 이유로 공모전이 열리지 못했던 이 기간은 스위스 책 디자인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저자들은 열 명의 전문가를 초청했고, 심사 위원들은 각자의 기준과 범주를 설정해 사라진 기간의 가장 아름다운 책을 선정했다.
리처드 홀리스는 책의 기능에 관한 기요르기 케페스의 말로 시작해 ‘다른 방식으로’, 즉 도구로서의 책을 본다. 너무 크고 무거운, 또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일치시키기 위해 앞뒤로 힘겹게 저글링 해야 하는 책들은 어떻게 다뤄야 하나? 책이라는 도구의 이상적인 기능과 책 디자인에 접근하는 방법을 상기하게 된다. 사라 고틀리브는 ‘책의미래 연구소’ 밥 스타인과 책의 새로운 형태에 관해 대화한다. 블로그 같은 디지털 시대의 책을 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우리는 그런 형태의 책을 만드는 시도의 성패를 단정할 수 없는 과도기에 있지만 그 모든 실험은 분명 책의 범주와 미래를 넓힌다. 크리시 찰턴의 현대 타이포그래피의 선구자 허버트 스펜서와 함께 일한 경험이나, 아르만트 메비스의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공감할 내용과 함께 ‘자기 아이디어’의 중요성에 이르는 일련의 메모는 이제 일을 시작하는 신입 디자이너는 물론 작업에 정체감이나 회의감이 온 경력 디자이너에게도 도움 될 것이다.
모든 이야기를 에세이로 다시 쓰고 책의 형태로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엮은이인 사라 드 본트와 프레이저 머거리지의 「들어가는 말」에서 그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우리 연구의 초기에 초청 연사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저는 실제로 강의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글로써 요점을 더욱 뚜렷하고 간결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게 최선입니다. … 강의를 듣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책이 훨씬 더 좋은 형태의 소통입니다.’” 일곱 편의 에세이 중 특별히 더 마음에 드는, 지금의 나에게 필요했던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꾸만 떠오르는 특정 문장을 자기만의 기조 내지는 강령으로 삼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날 때마다 펼쳐 읽을 수 있도록, 어디에든 들고 다닐 만큼 가볍게 만들었다. “우리는 여러분이 이제 이렇게 책의 형태로 나온 담화를 즐겼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