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994년 작고한 이규철의 유작 회고전을 기념해 만든 작품집이다. 이번 전시는 유족 및 지인들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유작들을 처음으로 모아 소개하는 전시로 그와 가장 가까웠던 지기 금누리와 제자 주수자가 주관했다. 지기 배병우와 안상수는 각각 사진 촬영과 책 디자인으로, 평론가 박영택은 글로 전시에 힘을 싣는다.
멋질비.이규철
편집자의 글
이규철(1948–1994)은 조각과 사진의 접점을 탐구하는 작업으로 1980년대 후반 무렵 한국 사진계에 등장했다. 그는 1970년 홍익대학교에 입학해 조각을 전공했으나 1988년 첫 개인전 «공간과 시지각»(관훈미술관, 1988)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정덕영이 기획한 «김성배, 강하진, 이규철 3인전»(갤러리 81-10, 1988), 구본창이 기획한 «사진, 새시좌전»(워커힐미술관, 1988) 등 국내 전통적인 사진의 표현 어법과 다른 새로운 사진을 모색했던 전시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94년 교통사고로 작고했다. 6년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에도 철학적이며 독자적인 미술 작업으로 자신의 사유와 상상을 시각화한 이규철은 모두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이규철은 입체와 평면의 사이를 오가며 조각과 사진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선보였다. 그는 홍익대학교 수학 시절 “작품의 빈속에 들어가 안쪽의 면을 둘러보”는 엉뚱한 상상을 하곤 했다. 이는 공간을 180도 내지는 360도로 선회하며 촬영한 납작한 사진 이미지를 조각의 표면에 부착하는 반원형이나 구(球) 혹은 박스 안에서 다시 입체화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상상을 구현할 도구를 직접 만들고, 면밀한 수학적 계산과 오랜 공정의 시간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최소한으로 축소한 화면, 카메라 렌즈의 틀이 복수로 병렬되어 무한한 세계로 나아간다. 조금씩 미끄러지고 어긋나면서 무수한 차이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이는 이질적인 시간, 엉켜있는 시점으로 우리 신체의 실존적 체험과 감각들이 반영된 독특한 화면으로 경험된다. 이로써 사진이 세계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음을,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이 처한 곤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규철의 작업은 조각이라는 매체에 대한 개념적 접근에서 출발하지만 실은 미술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 즉 ‘본다는 것’의 문제 및 시각과 지각, 그리고 주어진 공간/세계의 재현에 대한 탐구가 그 저변에 단단하게 깔려 있다. 그런 면에서 개념미술의 성향 및 지적인 성격이 상당히 짙다. 그는 사진에 대한 일반적 접근을 바꾸는 놀라운 시각적 충격을 선사하며, 사진 매체를 조형적/시지각의 문제로서 구현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이 책을 통해 시대의 격랑 속에서 예술가의 시각을 맹렬히 담아낸 ‘멋질비(미술가)’이자, 친구이자 동료, 아버지로서 기억되는 ‘사람’ 이규철을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책 속에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중심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에 마음의 중심을 두며 살고 있는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은 지구 중력의 중심점을 기준으로 해 평형감각을 유지하며 지탱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 삶의 터전인 지구는 이즈음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지구에서 과연 무엇을 가치 기준으로 하여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가. 우리들의 아이들은 어떠한 상황에 던져질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구 중심점과 평형감각과의 관계를 구형체에 담아보면서 우리를 또 나를 돌이켜본다.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보는 것일까. 정녕 어떠한 마음으로 어느 길을 가고 있는지…
금누리 뿐만 아니라 이규철은 새로운 생각을 펼쳐 나갔지요. 그리고 그가 생각해낸 것을 보여주려고 꼼꼼하게 풀어나갔어요. 그의 멋질들은 남들이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만드는 솜씨도 있어야 했습니다. 글이나 바탕 그림으로 남아 있어요, 그것들을 보면 마치 새로운 셈풀이를 적어놓은 듯 보이기도 합니다.
주수자 성격은 다분히 감성적이셨지만 작품을 준비했던 데는 과학자의 적확성을 갖추고 있으셨네요― 이토록 꼼꼼한 계산과 치밀한 계획을 하셨다니! 그가 왜 자신의 작품 전시회를 ‘연구결과’로 명명했는지 비로소 이해됩니다.
주수자 오래 살면서 자신의 대표작을 되풀이하면서 유명세를 유지하는 작가들은 정말 추해요. 예술은 비즈니스가 아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규철 선생님은 동시대인이 그의 시선을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끝까지 예술가의 자세를 유지하셨던 것 같아요― 고뇌는 많았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거든요.
금누리 삶이 길던 짧던 스스로를 끝까지 잘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했듯이, 멋질비는 삶이 끝날 때까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스스로 삶의 꼭지에 오른 것일 테죠.
주수자 그의 생애는 길지 않았고 우리와의 만남도 짧았지만,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경이로운 관점을 탐구했던 진실한 사람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네요.
이런 작업 과정에 대한 어려움과 새로운 연장을 만들고자 했던 시도를 그는 내게 이야기해주곤 했다. 이규철이 사유했던 생각들을 현재의 일상 속에서 마주하게 된다. 그가 작업을 계속했더라면 분명 새로운 작업이 나왔을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규철은 자신의 여러 생각들, 계속해야 하는지 또는 포기해야 하는지를 아주 조용조용히 내게 이야기했고, 거기에 마음의 감동을 받은 나와 금누리는 그의 독특한 세계를 이해하고 도우려고 했다. 1994년 봄 아침, 갑자기 미완인 아이디어의 원천이 멈추었다. 그가 ‘자아의 집’을 반성하고 ‘중생의 집’을 지어 ‘공생공존’의 터전을 짓고자 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아쉽다!.그래도.그의.작품은 유니크하고, 여기 우리 앞에 남아 있다. 귀한 선물로!
미술과 사진에서 ‘보는 것’은 핵심이다. 따라서 대상을 보는 주체의 시각과 보는 방식의 문제는 미술의 근본 구조를 형성한다. 따라서 시각이미지를 생산하는 작가들은 결국 세상을 보는 시각과 보는 방식을 고민할 수밖에 없고 이를 물질적으로 구현해 외화시키는 것이 결국 자신의 작업의 근간이 된다. 이규철의 작업은 조각, 사진의 장르나 그 장르에 견인되어 온 작업의 세계를 따르는 대신 미술에서 가장 일차적 문제, 곧 ‘본다는 것’과 ‘시지각’이 무엇인가를 우선적으로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자신의 모색이 효과적으로 표출되는 매체, 방법론으로 사진과 사진조각들을 이어붙인 작업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규철의 사진은 우리가 사진을 통해 사물을 바라볼 때의 원근법과 시지각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일깨워준다. 대개 사진이란 고정된 한곳에서 일정한 범위만큼 보여주는데 사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폭넓은 세계의 한 파편일 뿐이다. 그는 독특한 장치를 고안하여, 우리가 보는 공간을 일정한 각도로 분할 촬영하여 다시 이어 붙여서 또 다른 세계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전체적인 세계의 상과 가까운 것이다. 면밀한 수학적 계산과 오랜 공정의 시간이 축적되어 비로소 이루어지는 이 작업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 개성적 성과와 뛰어난 성과로 압축되어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따라서 현실과 매우 멀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현실과 아주 가깝기도 한 미묘한 체험을 제공해준다. 허공에 매달린 그의 구안에, 표면에 부착된 작은 사진 조각들은 우주 속에 자리한 인간이란 존재의 시선과 몸에 대한 풍부한 사색을 던져준다는 면에서 필자가 본 그 어떤 사진보다도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물음을 진지하게 전해주는 작업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필시 그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그 지나친 진지함과 조심스러움이 그의 생애를 그렇게 짧게 단절시킨 이유였으리라고 남겨진 그의 작품을 음미하면서 추측해보는 것이다.
차례
아버지,.멋질비.이규철 (이정현)
이규철.멋질들.
이규철을.돌아보다. (금누리, 주수자)
벗.이규철.단상. (배병우)
이규철이.찍은.빛박이들.
이규철.-.혼자만이.보는.세계. (박영택)
이규철.연보.
멋질들.추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