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눈에 익숙한 《더 타임스》의 타임스뉴로만(Times New Roman)체, 그리고 지금도 자주 사용되는 길산스(Gill Sans), 퍼페추아(Perpetua), 벰보(Bembo)와 같은 서체는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이 책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은 타임스뉴로만 서체를 직접 디자인한 영국 타이포그래퍼 스탠리 모리슨이 책의 대중화가 시작되던 시점에 누구나 읽기 쉬운 서적을 위한 타이포그래피의 원칙을 정리한 책이다.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
First Principles of Typography
편집자의 글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의 타임스뉴로만 서체를 디자인한
스탠리 모리슨이 말하는 타이포그래피의 첫 원칙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스탠리 모리슨이 이 글을 쓰기 전에는 서적을 위한 타이포그래피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스탠리 모리슨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이포그래피 전문 잡지 《더 플러런(The Fleuron)》에 이 책의 근간이 된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First Principles of Typography)」이라는 글을 게재한 이후 잡지가 절판되었음에도 많은 관련 업계 종사자가 이 글을 찾아 헤매고 글이 실린 잡지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불법 복제본까지 돌아다닌다. 이러한 수요를 고려해 스탠리 모리슨은 1936년에 아주 얇은 양장본 책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First Principles of Typography)』을 펴내기에 이르렀고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967년, 이 책은 모리슨이 세상을 떠나던 해에 한 번 더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초판 발행 후 80년이 지난 지금, 초판 디자인을 최대한 구현한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이 한국 독자와 만나게 되었다. 다양한 타이포그래픽 디자인이 존재하는 지금, 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누구나에게 통용될 수 있는 타이포그래피의 기본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옛글로 치부하기에는 지금과도 잘 어울리는 이야기
스탠리 모리슨은 40여 쪽에 불과한 이 짧은 글 안에서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인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주제를 짜임새 있게 다루고 있다. 그가 내세우는 원칙은 이러하다. ‘책을 만드는 사람은 독자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서체를 선택해야 한다’ ‘지나치게 자신의 개성만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독자들은 일정 개수의 단어로 구성된 문장을 가장 편안하게 읽는다’ ‘행간을 적절히 조정하여 독자가 같은 문장을 두세 번씩 읽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과한 장식적 요소는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80여 년 전의 타이포그래퍼가 쓴 글이지만, 현 대의 편집 또는 북 디자이너들도 충분히 참고하고 새겨들을만한 이야기다. 스탠리 모리슨이 글을 쓰던 시기는 책을 읽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났던 때였다. 소수의 엘리트만 책을 읽었던 시절에는 개성이 강하고 예술성이 뛰어난 서체를 써도 충분히 수용될 수 있었지만, 1930년대 당시만 해도 독자층이 ‘대중’으로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엄격한 원칙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한 맥락을 생각한다면 지금에 와서도 이 책을 외면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타이포그래피를 넘어서도 유효한 한 직업인의 메시지
1967년 두 번째 에디션 서문과 후기, 한국 타이포그래피 전문가들의 글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스탠리 모리슨의 원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이자 기능 인, 직업인으로서 자신만의 명확한 원칙을 지니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한 일이다. 이 책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실무 지식을 다루고 있지만, 사려 깊은 독자들이라면 한 직업인이 가진 확고한 철학도 함께 읽어낼 수 있다. 한편 이번에 출간되는 한국어판에는 1967년에 출간된 두 번째 판의 서문과 후기 글을 더하고 한국의 타이포그래피 전문가 이용제와 박지훈이 타이포그래피 전반에 관해 그리고 디자이너 김수정이 스탠리 모리슨과 왜 이 책이 필요한지 대한 글을 덧붙여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스탠리 모리슨은 1967년 후기글에서 처음 글을 쓴 뒤 30년이 지난 당시 시점에서 왜 자신이 내세운 원칙이 여전히 유효한지, 현대 산업 사회에서 차지하는 예술의 역할과 중요성을 설명한다. 이 글들을 통해 이 책의 초판 출 간 시점인 1930년대의 타이포그래피와 30여 년 후 두 번째 에디션이 출간될 때의 대략적인 맥락을 이해할 수 있으며 시대를 뛰어넘어 왜 지금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을 뒤돌아봐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어떤 인쇄업자도 ‘나는 예술가이므로 남의 말은 듣지 않겠다. 나만의 글자꼴을 만들겠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 겸허한 작업에서 그러한 개인주의는 어떤 독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쇄술 초기에 그랬던 것과는 달리 더 이상 대중은 뚜렷하게 두드러지거나 지나치게 개인적인 서체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글을 읽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고 그에 따라 변화의 속도도 느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대량 생산되는 책이나 한정판에 필요한 사항이 종류나 정도 면에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 는 바이다. 본질적으로는 모든 인쇄가 관습적인 알파벳 코드로 조판된 텍스트를 복제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판의 필수적인 세부사항에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텍스트를 획일적으로 보여주자는 뜻은 아니다. 이미 지적했듯 도입부 페이지는 타이포그래피적 독창성을 발휘할 여지를 최대한 제공한다.
건축과 시공 그리고 타이포그래피와 인쇄에는 공통으로 적용되는 두 가지 구성적 특징이 있다. 두 분야의 예술 에서는 이 둘을 주요 원칙으로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바로 사용하는 재료를 존중하고 이들의 본질적인 사회적 목적에 부합하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건축과 마찬가지로 타이포그래피 활동은 ‘봉사자의 예술servant art’이다. 건축과 타이포그래피는 본래 문명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바로 지금, 읽기 편한 조판을 위한 타이포그래피 원칙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신 타이포그래피를 받아들였던 때처럼 스탠리 모리슨이 제시한 ‘읽기 편한 타이포그래피’ 원칙을 깊이 관찰하고 한글에 맞춰 활자를 선택하고 운용해볼 수 있다. 모리슨의 원칙을 한글 타이포그래피 원칙으로 그대로 차용할 수는 없지만 모리슨이 타이포그래피 원칙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요소를 나열하고 여기에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롭게 고려해야 할 요소를 더해본다. 이를 통해 읽기 편한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원칙을 세우는 시도까지 해볼 수 있다.
우리는 고전이 주는 가르침을 접할 때 “이미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같은 말을 쉬이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환경의 차이를 정확히 인식한 상황에서 접하는 고전이라면 오늘날 작업 환경에서의 편의와 더불어, 묵인하고 있는 단점을 인식하고 과거로부터의 인수인계 내용을 보다 폭넓게 짚어볼 수 있는 현명함으로 작용할 것이다.
스탠리 모리슨의 책이 출간된 지 80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의 이론이 상당히 옳다는 것이 긴 시간을 거치며 많은 사람을 통해 입증되었다. ‘스탠리 모리슨과 얀 치홀트는 글꼴 디자이너 및 타이포그래퍼 들의 활동 공간을 극심하게 축소했다.’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도 그들이 세운 기준과 규칙이 꽤 엄격하고 단단해 우리가 밟고 올라서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차례
1936년도판 서문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
1967년도판 서문
1967년도판 후기
주석
‘타이포그래피 원칙’은 필요한가
디지털 공간과 아날로그 공간
규칙을 깨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