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이너 권준호가 10년간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끄적인 메모와 매체에 기고한 글, 이메일로 주고받은 편지를 엮었다. “견적 비교를 위한 견적서는 보내지 않습니다.” “디자이너 역시 한 사회의 구성원이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는다.” 예산과 일정, 취향과 목적 사이에서 벌어지는 클라이언트와의 줄다리기, 용역업체와 창작자 사이에서 방향을 잃거나 균형을 잡아야 하는 순간, “진짜 내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 등, 지금 현재의 디자인 작업자로서 겪어온, 또는 실천하고자 하는 것들에 관한 “매우 사적인 기록과 제법 공적인 발언”들이다.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
편집자의 글
매일의 디자인으로 ‘실천’하려는 한 디자이너의 ‘일상’
‘일상의실천’ 웹사이트에서는 자신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일상의실천은 권준호, 김경철, 김어진이 운영하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일상의실천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또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소규모 공동체입니다.” 일상의실천이란 이름에는 ‘○○디자인’ ‘○○그래픽’과 같은 디자인 스튜디오임을 알리는 어떤 단어도 없지만, ‘일상’과 ‘실천’이라는 두 낱말에 이 디자인 스튜디오의 모든 정체성이 있다.
디자인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통용되는가. 무엇을 굳이 ‘디자인한다’는 것, 또는 ‘디자인한 것’과 ‘디자인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 그 배경에는 보다 아름답게, 세련되게, 지나가는 말로는 힙하게 만든다는 맥락이 있다. 어떤 면에서 현대미술보다 대중 가까이서 현대의 예술을 감각하는 분야가 디자인이다. 그러한 디자인계에서 이 스튜디오는 특별한 날이 아닌 “일상”과 언뜻 디자인과 연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실천”을 전면에 내세웠다. 여기서의 “실천”이란 예쁘고 멋지게 디자인하는 일만은 아니다. 노동으로서의 디자인을 하는 한 사람, 직업인이자 개인으로서 그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 그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본인이 해야 한다고 믿는 사회적 실천이 본체다.
‘갑과 을’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클라이언트와 용역업체로서의 관계, 협업자의 위치에 있지만 그 안에서도 미묘하게 작용하는 큐레이터와 디자이너의 관계, 실체가 불분명한 대중을 대상으로 한 “대중적인 디자인”에 의문을 갖고 “진짜 내 작업”을 하고 싶은 창작자로서의 욕망이 그의 일상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디자인에 대해 고민하고, 부러 시민 단체에 찾아가 ’획일적 디자인‘을 바꿔주겠다 하고, 노동자의 ”뜨거운 글“을 세상에 펴낸 출판사에 연락해 ”현실에서 마주하는 문제를 외면하지 않을 최소한의 노력“으로 협업을 하고 싶다고 제안하는 일이 그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 모든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 안과 바깥에 “어딘가 어색하고 쑥스러운 모습으로 붕 떠 있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와, 할머니가 글을 배우며 필사한 성경 노트를 책으로 엮는 손자가 있다. 이 책은 권준호라는 디자이너의 “제법 공적인 발언”이자 한국 사회를 평범하게 거쳐온 한 시민의 “매우 사적인 기록”이다.
책 속에서
어느 날 아무 내용도 없이 첨부파일 하나를 보내면서 ‘견적을 넣어달라’는 메일을 무시했더니, 작업실로 전화가 왔다. 너무나 당당하게 왜 견적을 안 보내냐고 묻는 그에게 ‘견적 비교를 위한 견적서는 보내지 않는다’고 대답하자, 그는 ‘업체의 견적을 비교하고 최저가를 제시한 업체를 고르는 게 뭐가 문제냐’고 되물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가격 비교를 하듯이 디자인 역시 최저가에 구매하겠다는 발상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반박하려다가, 그 떨떠름하고 무신경한 목소리에 어떤 무력감이 차올라 ‘그렇게 작업 안 합니다’라고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디자인 강국을 외치는 한국에서 ‘@korea.kr’ 이메일 계정을 쓰는 ‘홍보 담당자’의 무감한 태도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디자이너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디쯤에 머무르는지 가늠하게 한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페스티벌이나 공공 미술 전시의 경우, 특정 대상이 아닌 일반 ‘대중’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이 진행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는 ‘대중’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해석이 엇갈린다. 앞서 언급한 클라이언트에게 대중은 노골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은 이미지에서는 어떠한 상징이나 은유도 읽어낼 수 없는 존재이며, 해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직설적인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오로지 대중의 취향에 맞춰서 디자인되었다는 작업은 한편으로 대중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대중의 눈높이를 무시하는 디자인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디자이너 역시 한 사회의 구성원이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는다.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일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떤 가치를 믿고 있다고 해서, 수많은 신념과 가치관이 혼재되어 있는 현대사회에서 그것이 어떠한 모순도 없는 순결한 가치일 수도 없다. 다만 이 작업이, 혹은 이 작업을 의뢰하는 클라이언트가 내가 믿고 있는 삶의 가치와 위배되지는 않는지, 이 작업의 결과물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은, 그것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업에 뚜렷한 책임감을 가지려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믿는다.
금요일 퇴근 시간 혹은 근무시간이 지난 늦은 시간 혹은 주말에 과업을 전달할 때
디자이너의 업무 시간을 분명하게 밝히고, 정해진 시간 외에는 답변이 어려움을 사전에 고지한다. “클라이언트님께서 주말에 테니스 칠 동안 저보고 일하라는 말인가요?”와 같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당신의 요구가 매우 부적절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주말 근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클라이언트라면 갑의 행동 양식을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아닌, 단순히 갑질을 시전하는 경우이므로, 그 작업은 더 늦기 전에 중지하는 것이 정신과 체력 건강에 좋다.
할머니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글자 하나하나를 필사하며 한글을 배웠다. 할머니는 수십 년간 들었던 성경의 이야기를 그림을 그리듯 따라 적으며, 글자의 구조와 획의 순서를 익혀나갔다. 할머니가 건네준 노트에 적혀 있는 글자에는 배우려는 사람의 간절함과 실수를 두려워하는 떨림이, 시간이 지나며 능숙해지는 획의 자신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당신이 작성한 원고의 제책을 의뢰했고, 그 의뢰는 나에게 ‘사물로서의 책’이 아닌 ‘서사가 담긴 물성으로서의 책’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한 디자이너로서의 첫 경험이었다.
차례
여는 글
디자이너의 글쓰기
ㄱ
가용 예산과 눈치 게임
견적 비교를 위한 견적서
교훈
그들의 동거
그와 그녀의 사정
꾸준함의 미덕
꿈의 형태
편지 1
소금꽃나무
ㄴ-ㄷ
나이
대중 가수 신해철
대중적인 디자인
대표님, 우리 대표님
디자이너의 인쇄소
디자인으로서의 사진,
사진으로서의 디자인
뜨거운 사람
뜻밖의 인연
더하는 글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 — 김경철
ㄹ-ㅂ
랑이의 죽음
만화
멘토
문법과 문체
배움의 순간들
블랙리스트
빵을 바치는 아이들
편지 2
어느 큐레이터에게 보내는 편지
ㅅ-ㅇ
생겨먹은 대로 작업하기
설거지
수작업의 즐거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용역 업체 입찰
운동의 방식
오리기, 풀칠하기, 붙이기
편지 3
디자이너의 전시
ㅈ
자발적 을에서 벗어나기
전형성과 급진성
정
정말 이런 작업을 해도 되나요?
존경
좋은 회사
진짜 내 작업
편지 4
어느 건축가에게 보내는 편지
ㅊ-ㅍ
창작과 노동
청년의 자격
팬톤 오렌지 021C
폭력의 은밀한 시작
프로란 무엇인가
핑계
부치는 글
우리의 다름이 안녕하기를 — 김어진
ㅎ
할머니의 성경책
형과 동생
닫는 글
협업의 조건
부록
큐레이터와의 대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