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백 년의 흐름이 한눈에 보이는 가장 명쾌한 문화 지도
과거가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였다면 지금은 ‘문화’의 시대이다. 그런데 문화란 과연 무엇일까? 누구나 쉽게 문화를 말하지만 정작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에 예술가이자 문화이론가로 현재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코디 최가 예술, 철학, 정치, 역사 등 20세기 문화의 모든 영역을 한 권의 일목요연한 지도로 정리했다. 이 책은 2006년에 출간되었던 『동시대 문화의 이해를 위한 20세기 문화 지형도』에서 못다한 설명을 더하여 다시 정리하고 내용의 흐름을 쉽게 볼 수 있도록 각 장마다 연대표를 추가하여 새롭게 출간한 개정판이다.
혹자는 이미 21세기가 시작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지나간 시간에 집착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0세기는 문화적으로 전 세계 인류의 정신계에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시기로, 20세기 백 년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이제 막 시작된 21세기의 문화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에게 이 문화 지형도가 필요한 까닭은 그것이 현재 우리를 둘러싼 동시대 문화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당연한 절차이기 때문이다.
코디 최가 그린 백 년의 문화 지형도는 20세기를 강타한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뿌리와 줄기를 낱낱이 파헤쳐 서양 문화의 근간이었던 유럽과 강대한 자본으로 20세기 문화를 주도한 미국, 그들에게 침투당한 우리나라와 제3세계의 문화를 입체적인 관점에서 살피며 서로의 관계와 위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줌으로써 단순한 지식 습득의 차원을 넘어 분별력 있는 지혜로 시대를 읽는 통찰력을 길러 준다.
모던, 20세기의 다른 이름
19세기까지 각 국가들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해 왔다.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인은 한복을 입었고, 일본인은 기모노를 입었다. 그런데 20세기가 시작된 지 불과 몇 십 년 만에 전 세계는 비슷한 복장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수천 년의 역사를 단번에 뛰어넘은 이 현상을 우리는 모더니티라 부르며,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정신적인 힘을 모더니즘이라 부른다. 모더니즘은 이성을 바탕으로 한 철학과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강력한 시대정신으로 부상했고, 사람들의 삶을 급속도로 변화시켰다. 모던이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급진적 아이디어를 구현하려던 진보적인 모더니스트들은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20세기를 이끌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먼저 모던의 전개 양상과 주요 이론을 소개한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모더니티를 훑어 내려가며 정치, 철학, 건축, 미술 등을 주도했던 모더니스트를 소개하고,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프로이트로 상징되는 모더니스트 이론을 꼼꼼히 추적한다. 또 도시, 대중, 엘리트, 대중문화, 사회주의 리얼리즘, 매카시즘 등 20세기를 수놓았던 대표적인 개념과 현상을 통해 모더니즘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를 상세히 보여 준다.
20년 이상 미국에서 예술과 학문을 탐구했던 저자 코디 최는 그 가운데 특히 자본주의를 앞세워 본래 서양의 중심이었던 유럽과 제3세계를 문화로 침공한 미국의 전략을 집요하게 파헤쳐 부각시킨다. 미국이 자국의 모더니즘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문화계에 침투시킨 CIA의 암약, 마르셀 뒤샹과 앤디 워홀이 팝문화의 아이콘으로 성공하게 된 배경 등, 흥미롭지만 후기 식민지 문화의 영향권에 있는 우리가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할 여러 가지 사실들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모던을 넘어서 포스트모던으로,
그리고 21세기가 시작된다
장 리오타르는 저서 『포스트모던의 조건』(1979)에서 “포스트모던은 모더니즘에 대한 불신과 실망 그리고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20세기 중후반, ‘엘리트’에 의해 시작되었던 모더니즘은 ‘대중’과의 대결에서 패하고 몰락의 길을 걷는다. 제2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전환기를 맞이한 모던 사회는 포스트모던으로 나아가며 방황과 혼란을 겪는다. 코디 최는 먼저 모더니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구조주의를 깨뜨리기 위해 소쉬르에게 반기를 든 포스트구조주의자들 롤랑 바르트,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질 들뢰즈 등을 소개하며 포스트모던의 시작을 알린다. 그러면서 유럽에서 시작된 포스트구조주의가 미국으로 건너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전이되었던 과정,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미 미국에서 종말을 고한 포스트구조주의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다소 기형적인 모습으로 뒤틀린 과정을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끝을 향해 달려가던 미국적 포스트모던의 마지막 모습을 ‘전성기’라 착각한 채 수입하는 데 급급했던 우리의 모습을 회고하며 우리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몰락한 포스트구조주의 이후 21세기를 여는 여러 가지 가설들에 주목한다.
이렇듯 코디 최의 『20세기 문화지형도』는 지난 백여 년의 시간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돌아보고, 20세기를 풍미한 사조들과 그 대표 인물을 통해 20세기의 문화와 사유의 궤적을 그려 보는 책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특히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날카롭게 제시하며, 우리에게 미국을 유심히 볼 것을 요구한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문화의 흐름을 직접 목격하고, 그 속에서 예술가이자 문화이론가로 치열하게 살아왔던 저자는 유럽에서 만개한 20세기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기본 방향을 자본이라는 거대한 힘으로 바꾸어 버리고, 우리를 비롯한 제3세계의 정신계까지 지배한 미국이라는 존재를 강하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이 땅의 척박한 문화적 현실을 진단하고, 20세기 이후 우리를 주도해 온 문화의 근간이 된 서양 문화의 밑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화를 표면적으로 이해하려 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경고한다.
코디 최는 우리에게 단순히 문화의 흐름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의 동기와 흔적을 추적하는 일이 더욱 중요함을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역설하는 이 책은 문화에 관심이 있고 현재와 미래의 문화를 이끌어 갈 우리 시대 지성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거울’이자 ‘지도’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