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포그래피를 둘러싼 두 예술가의 대립과 논쟁,
그리고 그 논쟁의 의미
당대를 호령하는 두 대가, 혹은 두 라이벌의 대립과 마찰은 늘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특히 이런 불화가 철학이나 역사 같은 학문 분야나 회화나 디자인 같은 예술 분야에서 벌어질 때는 단순히 가십거리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의미 있는 논쟁으로 확장되곤 한다. 이들 사이의 논쟁은 단순히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문제가 아닌, 전문가로서 자기 영역에 대한 확고한 소신이자 관점이며 자기표현이기 때문이다.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인 얀 치홀트와 막스 빌이 벌인 논쟁도 그런 측면에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두 사람의 의견이 대립하게 된 쟁점은 좁게 말하자면 대칭과 비대칭 타이포그래피 혹은 장식적 요소가 첨가된 타이포그래피와 배제된 타이포그래피 간의 충돌이었지만, 넓게 보자면 전통과 현대의 대립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열정과 애정, 창의력으로 다양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했기에 논쟁은 더 치열하고, 더 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책 『막스 빌 대 얀 치홀트: 타이포그래피 논쟁』의 지은이는 잡지 《슈바이쳐 그라피셰 미타일룽겐》에 실린 이 논쟁이 지금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주기 위해 그들의 논쟁을 다루기 앞서 디자인 선진국에서 일어났던 예술운동을 상세히 소개한다. 그 흐름 안에서 얀 치홀트와 막스 빌이 어떤 가치를 지니며, 그들의 작업이 그 흐름의 양상을 어떻게 주도하고 좌우했는지 상세히 설명한다. 이 책이 두 사람의 논쟁을 단순히 흥밋거리로 소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책 속에 성실하게 담긴 체계적인 타이포그래피의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술운동과 타이포그래피 역사까지 아우르는
막스 빌과 얀 치홀트의 포트폴리오
두 사람이 왜 이토록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 논쟁으로 당시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는 어떤 외연의 확장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논쟁으로 인해 두 사람은 어떤 길을 걷게 됐는지 후일담까지, 이 책은 얀 치홀트와 막스 빌이라는 걸출한 예술가들의 평전이자 포트폴리오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논쟁의 시발점이 된 얀 치홀트의 강연 ‘타이포그래피의 불변 요소’를 비판한 막스 빌의 「타이포그래피에 관하여」와 함께, 그 글에 대해 또다시 반론한 치홀트의 「신념과 현실」의 전문을 실었으며, 두 사람이 걸어온 타이포그래피의 변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한 설명과 풍부한 도판도 볼 수 있다. 더불어 그들을 둘러싼 다른 예술가들의 평론까지 접하고 나면 타이포그래피 분야를 뒤흔들었던 두 사람의 논쟁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단지, 오래전 서구 사회에서 벌어진 타이포그래피 논쟁을 소개한 책이 아니라, 한 예술 분야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뜨거운 열정을 쏟아낸 두 예술가의 단면을 통해 타이포그래피라는 현대적 디자인 영역이 어떤 과정을 통해 발전을 거듭했는지 그 역사와 의미를 논한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역사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