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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의 서양 디자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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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인이 쓴 최초의 서양 디자인사입니다.”
서양 디자인사를 서양 디자인사로,
타자의 역사를 제대로 보는 일에 관하여

오랫동안 한국 디자인에 대해 날카롭게 질문하며 담론의 장을 형성해온 디자인 평론가 최범. 이 책은 최범이 한국인으로서 처음 쓴 서양 디자인사이다.

편집자의 글

서양 디자인사는 보편사가 아니다

지은이는 디자인사를 다룬 기출간 도서 대부분이 서양인이나 일본인이 쓴 책의 번역본임을 지적한다. 또한 그 내용은 모두 서양 디자인사지만 “디자인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음을 강조한다. 『최범의 서양 디자인사』는 바로 여기서 논의를 출발한다. 우리가 서양의 디자인사를 절대적 보편으로 받아들였기에 이제 서양 디자인사를 타자화하고 상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양 디자인사가 한국 디자인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의 역사와 현실이 많이 다르기에 더 이상 서양 디자인사만으로 우리의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

『최범의 서양 디자인사』는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대신 서양 디자인사의 전반적인 흐름과 특성을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 개관과 보론 그리고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독자가 서양 디자인사의 흐름을 고르게 따라가도록, 나무가 아닌 숲을 조망할 수 있게 안내한다. 책은 서구 근대 디자인의 의미를 르네상스의 디세뇨 개념에서 찾기 시작해 20세기 후반까지 디자인 개념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조명한다. 19세기에 발전한 모순된 두 양식인 역사주의와 원기능주의, 윌리엄 모리스라는 인물과 아르누보의 특성을 살펴보며 모던 디자인을 예고한다. 20세기에는 수공예와 장식미학이 모던 디자인으로 바뀌는 과정, 바우하우스, 러시아 아방가르드 디자인, 아르데코를 살펴본다. 대량생산체제가 낳은 미국의 기능주의와 산업 디자인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디자인의 직접적 원형을 추적하기도 한다. 20세기 후반 대중소비사회에서 모던 디자인이 대중화되고 상업화되는 과정과 모던 디자인에서 벗어나려는 다양한 경향을 분석하기도 한다. 마지막은 우리가 서양 디자인사를 보는 관점을 이야기한다. 서양 디자인사를 타자의 역사로 봄으로써, 그리고 한국 디자인사를 세계 디자인사의 지형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 자신과 세계를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필로 그려낸 건축적 역사화

『최범의 서양 디자인사』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일러스트레이션에 있다. 역사책에는 사실을 증명하는 시각적 증거물인 사진이 들어가곤 한다. 하지만 이 책에는 서양 디자인사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구도의 사진이 없다. 대신 사진 이상의 사실성으로 역사를 뒷받침하는 연필 드로잉 일러스트레이션이 있다. 드로잉과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일러스트레이션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권민호가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각 장을 대표하는 인물과 작업 그리고 주제를 해석하여 역사적 맥락 위에 배치한다. 장에서 대비를 이루는 내용은 과감하게 전면에 드러냈고 펼친 지면의 특성을 활용해 그리기도 했다. 지은이 최범은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가리켜 “건축적 역사화”라고 하며 “역사적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과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는 영화의 특성을 하나의 화면에 엮어내는 그의 작업은 역사의 중층적 의미를 잘 드러내는 도큐먼트”라고 표했다.

우리 삶에 맞는, 우리의 디자인을 위하여

시각 디자인, 공공 디자인, 헤어 디자인, 라이프 디자인, 소셜 디자인 등 디자인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많이 쓰이는 시대이다. 과잉 담론화라고 할 만큼 디자인이 증폭된 오늘날 우리는 삶에 들어맞는 디자인을 찾았을까? 우리 삶 가까이에 디자인이 있는가? 디자인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가? 최범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서양에서 들어온 디자인이 한국화되지 못한 채 근대의 식민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서양 디자인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구 디자인을 무조건 숭배하거나 반대로 국수주의적인 폐쇄성에 갇히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서양 디자인사를 서양 디자인사, 즉 타자의 역사로 봐야 한다. 이 책은 얇고 압축적이지만 어렵지 않게 쓰여 디자인 연구자뿐 아니라 디자인과 예술서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까지 아우를 수 있다. 또한 한국 디자인사 연구의 필요성을 촉진하고, 한국 디자인사를 세계 디자인사의 지형에 위치시켜 자신과 세계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책 속에서

어쩌면 아직도 제대로 된 한국 디자인사가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서양 디자인사를 타자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서양 디자인사를 알아야 하는 진짜 중요한 이유는 글로벌 인재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땅의 디자인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머리말」, 8쪽

윌리엄 모리스로부터 바우하우스에 이르는 모던 디자인은 대단히 엘리트적이며 고급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실험하고 개척한 스타일은 언제나 대중의 취향에 맞게 재가공되었을 때에만 산업화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엘리트 디자이너의 비판적 문제의식은 일정하게 제거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결국 엘리트 디자이너의 자기 부정, 즉 엘리트로서의 책임감을 회피하고 대중적 취향을 작업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디세뇨에서 포스트모던까지」, 32–33쪽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교육 방식에 바로 적용되었다. 바우하우스 교육의 특징은 창조적인 기초 과정의 운용과 철저한 공방 교육의 실시에 있었다. 기초 과정은 이제까지의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새로운 창조성을 얻기 위한 것으로, 과거 아카데미의 지배적인 기초 교육 방식이었던 모방에서 과감히 벗어나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실천」, 109쪽

아르누보에서는 여전히 자연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으며 산업과 자연을 화해시키려는 마지막 안간힘을 찾아볼 수 있었다. 반면 아르데코는 전혀 다르다. 아르데코에서는 자연에 대한 향수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아르데코는 근본적으로 도시적인 예술인 것이다. 현대미술에서의 기하학적 추상, 속도감 등은 아르데코의 도시적인 특성을 살리는 데 아주 적합한 요소였다.

「모더니즘과 장식미술의 만남, 아르데코」, 139–140쪽

전문직 디자이너의 탄생은 바로 미국 디자인이 자본주의 시장 체제 속에서 디자인을 유력한 경쟁 수단으로 파악하고 활용하였다는 사실과 직접 관련된다. 사실 현대 미국 디자인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디자인의 직접적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은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여 판매를 촉진함으로써 시장의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정착되어갔다.

「미국 산업 디자인의 발달」, 154–155쪽

오로지 서양 디자인사를 기준으로 한국 디자인사의 미달을 따지는 것도 문제지만, 서양 디자인사의 엄연한 지배적 위상을 부정하고 ‘우리만’의 디자인사를 운운하는 것도 생각과는 달리 주체적이지 않다. 독립은 고립이 아니다. 독립은 고립이기는커녕 철저히 타자와 교섭하는 가운데 주체성을 찾아가는 탄력적인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서양 디자인사와 한국 디자인사의 관계는 그러한 교섭과 작용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보론: 서양 디자인사를 보는 눈」, 200–201쪽

차례

개관: 디세뇨에서 포스트모던까지

역사주의와 원기능주의
월리엄 모리스와 미술공예운동
세기말의 양식, 아르누보
기계 미학과 모던 디자인의 선구자들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실천
러시아혁명기의 아방가르드 디자인
모더니즘과 장식미술의 만남, 아르데코
미국 산업 디자인의 발달
모더니즘의 산업화와 대중화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양상

보론: 서양 디자인사를 보는 눈

최범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 디자인 비평 전문지 《디자인 평론》의 편집인을 역임했다.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와 문화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한국 디자인 신화를 넘어서』 『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 『한국 디자인의 문명과 야만』 『공예를 생각한다』 『최 범의 서양 디자인사』 『한국 디자인과 문명의 전환』 『한국 디자인 뒤집어 보기』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디자인과 유토피아』 『20세기 디자인과 문화』가 있다.

권민호

드로어, 일러스트레이터. 영국 센트럴세인트마틴스(Central Saint Martins)와 왕립예술대학(RCA) 대학원에서 비주얼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드로잉과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일러스트레이션과 순수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하고 있다. 런던 Factum-Arte, Bompas & Parr, Jotta studio, RA 등과 일했고 저우드 드로잉 프라이즈, V&A 일러스트레이션 어워즈, 런던 디자인 페스트발 서스테인 RCA 등에서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프로젝트, 타이포잔치 2017 등에서 작업을 선보이고 전시를 기획했다. 2019년 문화비축기지에서 드로잉에 기반한 뉴미디어 전시 〈새벽종은 울렸고 새아침도 밝았네〉를 선보였다. 서울대학교 디자인학부 석·박사 과정에서 비주얼내러티브를 강의하고,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일러스트레이션 스튜디오(PaTI.is) 마루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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