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2022 볼로냐 라가치상
이수지 작가가 분홍색 선율로 그린
이 세상의 가장 약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위한 춤
『춤을 추었어』는 모리스 라벨의 춤곡 〈볼레로 Boléro〉로부터 출발한다. 〈볼레로〉는 스네어 드럼의 반복되는 리듬 위에 두 가지의 같은 선율을 여러 악기가 계속 추가되며 연주하는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들릴 듯 말 듯 한 희미한 드럼 소리로 시작하지만, 악기가 추가되면서 소리가 쌓이고 커지는 크레셴도의 구성이 이어지다 마지막에는 그 소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무너지듯 끝난다. 작가는 이러한 〈볼레로〉의 구성이 그림책의 고전적 서사 흐름과 비슷하다고 보고, 〈볼레로〉의 18개의 구조를 차용해 18개의 풍경을 그렸다.
“어느 날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전쟁과 도심에서 열린 불꽃놀이 축제 사진이 인터넷 뉴스 창에 나란히 뜬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왈츠에 맞춰 나가지만, 과연 나아가는 것일까요.” - 작가의 말
첫 장을 넘기면 동그란 뺨에 검댕이 묻은 아이가 눈을 뜬다. 꿈에 드는 것인지, 깨어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이는 동그란 점 하나와 지휘봉을 들고 단 위에 선다. 검은 점은 아이의 생이다. 점은 공을 닮았다. 아이가 공을 던지고, 공이 튀어 오르며 춤이 시작된다. 춤을 추며 나아가는 여정에서 아이는 온갖 것을 만나고, 그 모두와 친구가 된다. 자연은 아름다우면서도 위협적이지만, 그 안에서 모두는 각자의 리듬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춘다. 춤곡은 아름답지만 기묘하고 엉뚱하기도 하다. 그러다 전쟁은 느닷없이 터지고 삶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음악은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이내 눈부신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불꽃은 타오르는 생의 정점 같기도, 타버린 사의 정점 같기도 하다. 공은 미동이 없고, 지휘봉은 방향을 잃는다. 그러나 생은 다시 발견되고, 상흔이 남았다.
책의 배경 음악이 되는 〈볼레로〉는 〈비밀은 없다〉 〈보건교사 안은영〉 〈부산행〉 등의 영화 음악감독이자 어어부 프로젝트, 비빙, 씽씽을 거쳐 현재 이날치로 활동 중인 장영규 음악감독이 맡았다. 기존의 틀을 해체하고 조립해 온 음악 성향처럼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를 재해석해 짧은 애니메이션을 보듯 아이의 여정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하고 몰입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그림책은 인쇄된 네모난 책 너머로 어떻게 나아갈까
아날로그 세계에서 NFT로 확장하는 그림책
이수지 작가는 여러 차례 그림책 외연의 확장을 시도해 왔다. 『물이 되는 꿈』은 음악가 루시드 폴의 노래로부터 시작했고, 『여름이 온다』는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모티브로 그림책이 음악 자체가 되려는 시도였다. 2022년 한국인 최초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받은 것은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이 예술작품으로 확장되어 어린이 독자부터 성인 독자까지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장르가 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춤을 추었어』는 ‘글 없는 그림책’과 다양한 제작 실험을 시도한 이수지 작가의 새로운 시도이다. 이 책은 전통적인 인쇄 매체를 벗어나 새로운 영역으로 넘어가기 위한 〈춤을 추었어 Danced Away〉 프로젝트로부터 탄생했다. 현대카드와 모던라이언이 운영하는 NFT 마켓플레이스 KONKRIT에서는 『춤을 추었어』의 18개 풍경을 18편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영상을 NFT로 발행한다. 동시에 같은 NFT 에디션 수만큼 『춤을 추었어』의 특별판이 제작된다. 특별판은 이수지 작가의 그림을 보다 원화의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독립된 페이지로 구성된다. 각 페이지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기도 하며, 모든 페이지를 연결하면 시각적 악보가 된다.
10월에는 국내 최초로 책을 주제로 설립된 어린이 미술관인 현대어린이책미술관과 함께 특별 전시 《춤을 추었어 Danced Away》가 열린다. 전시에서는 『춤을 추었어』 책 속 이수지 작가의 원화 작품과 장영규 음악감독의 선율과 함께 움직이는 그림을 더욱 선명하고 몰입감 있게 감상할 수 있다. 그림책, 음악,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춤을 추었어 Danced Away〉 프로젝트는 출판의 확장을 시도한다. 책 너머의 영역에 손을 뻗어보면서 동시에 여전히 책을 보여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