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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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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이 한없이 작아질 때,
어딘가에서 읽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번번한 용기를 주었어요.”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 〈다시, 이 책〉

출간 이래 꾸준히 읽혀온 『어떤 이름에게』의 리커버판을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 〈다시, 이 책〉과 함께 선보인다. 리커버판에서는 이 책의 정서를 한층 더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프리랜스 에디터이자 아트 디렉터 박선아는 베를린, 바르셀로나, 파리에 머물며 소중한 이들에게 글을 쓰고 필름 사진을 찍었다. 가족, 친구, 옛 애인, 고양이 등에게 쓴 서른두 통의 편지에는 그들의 실제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어도 수신자의 정확한 이름은 모른다. 그렇기에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밀한 글은 곧 독자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책은 분명 대상이 있는 편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것들의 기록이다. 그렇기에 리커버판은 한 사람의 기억을 고이 보관하는 사물, 즉 일기장과 같은 천 재질의 양장본에 담았다. 그 과정에서 서간집과 엽서집이 하나로 묶이며 도구로서의 책의 성질에 충실히 접근해 한 손에 들고 읽기 좋은 형태로 완성했다. 이를 위해 너무 묵직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재질뿐 아니라 색 또한 신경 쓰고, 박선아의 손글씨를 디자인에 활용한 반투명 세로 띠지를 더했다. 띠지는 저자가 리커버판 독자에게 보내는 손글씨 편지의 일부분으로 책 안에 동봉되어 있다. 이 책이 새 옷을 입고도 오래도록 사랑받기를 바라며 준비한 작은 선물이기도 하다.

편집자의 글

“여행하며 마주한 이야기를 그때그때 떠오른 이에게 편지로 써뒀습니다.

매일 아는 것은 늘어나는데, 우리는 그중 무엇을 기억하게 될까요.”

박선아는 작고 느리고 비밀스러운 것을 아끼는 사람이다. 고양이 모찌와 ‘작은 집에서, 넓은 사람과, 깊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오랜 꿈이다. 여러 브랜드와 함께 일하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아름다운 것들을 모은다. 《어라운드》 매거진에서 에디터로 일했으며, 당시 매거진에 연재한 글을 모아 출간한 수필집 『20킬로그램의 삶』은 20–30대 독자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 책 『어떤 이름에게』에 담긴 모든 편지는 여행지에서 썼지만 여행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그저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했던 따뜻한 순간들로 이동해 그것들을 어루만진다. 그 안에서 현재와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나지막하고 비밀스러운 것들

『어떤 이름에게』에는 천천히 보고 싶은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기어가는 달팽이, 천장에 비친 불빛, 용기를 냈던 날들, 세탁소 앞 강아지의 눈웃음,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는 사람의 뒷모습, 두유와 생크림을 넣어 끓인 카레, 손전등 없는 달빛산행…… 박선아는 주위의 풍경, 색깔, 향기, 감촉을 소중하게 붙든다. 이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의 안에서 머문다.

그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틈틈이 편지를 쓰고 사진을 찍는다. 베를린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잠시 머무는 방에서, 크고 밝은 달을 보면서, 책을 읽다가, 그리고 이름 모를 나무 아래에서도. 커피를 주문한 뒤 잔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점원이 민망해할까 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기다리면서도 편지를 쓴다. 바르셀로나의 한 해변에 앉아 어떤 남성이 아이에게 바다를 보여주는 것을 바라보며, 훗날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있어야만 하는 것들을 생각한다.

사진과 글이라는 두 가지 언어

“무엇인가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축제에, 눈에, 꽃 한 송이에……. 그 무엇에든지. 그렇지 않으면 잿빛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몹시도 가난하고 꿈이 메말라버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주 쉽사리 자기의 동심을 잃어버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 한 사람의 스크루지가 되어 버린다.”(『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중에서, 전혜린 지음) 책에 인용한 전혜린의 글처럼, 박선아는 글과 사진을 통해 우리가 스크루지가 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책에 들어간 모든 사진은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 사진과 글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부속이 되지 않고 어우러진다. 영국의 미술 비평가이자 소설가 존 버거는 “언어는 언제나 경험보다 적다”라고 했다. 그렇기에 글과 그림을 함께 두어, 전달하지 못하는 방식을 줄여 보완했다. 박선아도 『어떤 이름에게』에서 사진이 글의 보충 설명이, 글이 사진의 캡션이 되지 않도록 했다. 두 언어를 어떻게 결합하여 독자에게 오롯이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것이다. 독자는 글과 사진으로 이루어진 언어를 읽으며 저자의 경험을 들여다본다.

여행에서 잡아둔 순간이 다시 먼 곳으로

여행지에서는 문득 소중한 이름들, 놓치고 있었던 무언가가 떠오르곤 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함께 보고 싶은 사람이나, 이전에 경험했던 비슷한 장면이 생각나기도 한다. 안녕이 궁금한 이들에게 바로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잠시 멈춰서 편지를 쓰고, 아껴서 천천히 부쳐보면 어떨까. 여행지가 아니더라도 한 손에 책을 든 채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방 안에서 가볍게 읽고 쓸 수도 있다. 이 책을 통해 각자 자신의 소중한 이름들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십년지기 친구에게, 좋아하던 동생에게, 그리운 선생님에게, 할머니에게, 반려동물과 식물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그들의 안녕을 바라볼 것이다.

책 속에서

ㅇ는 캐리어를 내려주고 공항 밖으로 빠져나갔고, 나는 ㅇ가 탄 차가 사라지고 난 뒤에 공항으로 들어왔어. 오늘 비행기를 안 탔다면 우리는 어딘가에서 차를 마셨을까? ㅇ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오늘 함께 차를 마시지 못한 걸 언젠가 후회하게 될까? 모르겠다. 나는 늘 엄마가 그리워.

11쪽, 「그리움」에서

‘달빛산행 갈 사람은 밤 8시까지 후문으로 올 것!’ 가로등도 없고, 손전등도 없이 달빛에 의지해 산을 오르는 산책이었어. 가능할 것 같지 않지만, 거뜬해. 달빛만으로 산에 오를 수 있더라. 그땐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달빛이 밝다는 걸 알았는데, 그로부터 10여 년이 더 지난 지금은 지구 어디에서도 같은 달을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네.

27쪽, 「달」에서

네가 지금 몇 가지 별자리를 기억하게 되었듯, 그렇게 매해 한두 가지씩 아는 이름이 늘어나면 좋지 않을까 싶어. 네가 알게 되는 어느 식물이나 별자리의 이름에 나도 같이 새겨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 매일 아는 것은 늘어나는데, 우리는 그중 무엇을 기억하게 될까.

43쪽, 「어떤 이름들」에서

타인의 은밀함을 훔쳐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는 것 아닐까. 누군가의 일기나 편지를 몰래 본 기억은 내게만 있는 건가. 내가 종종 얘기했던 것 기억나? 나에겐 비밀이 참 중요하다고.

49쪽, 「비밀스러운 삶」에서

같은 길이어도 그날의 음반에 따라 많은 게 달라 보이더라.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네가 생각났어. 너는 계속 음악을 만들고 있을까? 네가 들어보라며 보내준 음악들과 네가 만든 곡들 덕분에 살만했던 날들이 있었는데. 언젠가는 그게 쓸모없는 일이라며 한숨을 쉬던 네 모습도 기억 나. 네가 만든 음악을 들으며 같은 풍경을 달리 볼 사람들을 그려봤어. 너 대신에.

65쪽, 「밤 산책」에서

너는 우리가 서로의 기쁜 일과 슬픈 일에 함께하지 못한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 버스에 타서 경적을 울리던 차들이나 우리 엄마의 들뜬 목소리를 생각하다가, 한 번도 너와 함께 늙어갈 일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어. 내가 돌아가면 곧 네 결혼식이 있겠네. 나도 네 결혼식에 큰 경적을 울려야지.

73쪽, 「함께 늙어가는 일」에서

홀로 있었으면 주저하다가 놓쳐버렸을 일을 언니는 냉큼 붙잡아 제게 줬어요. 그걸 슬쩍 잡으면 “선아가 잡았다!” 하며 손뼉을 쳐주는 식이었죠. 그런 언니가 바르셀로나로 떠나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요. 그래도 또 이렇게 바르셀로나에서 만나다니, 좋네요.

177쪽, 「자전거를 탄 우리들」에서

아빠가 병원에 실려가는 것을 본 다음부터는 구급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어요. 마음이 무거운 날에는 청승맞게 그 자리에서 울기도 하죠. 거리에서 어딘지 모르게 멍한 사람을 보면 무서웠는데, 이제는 그 안에서 아빠가 보이고, 눈이 먼 사람에게서는 온통 ㅎ가 보여요. 그들이 저를 필요로 할까, 잠시 기다려보기도 하고요.

225쪽, 「눈에 보이는 슬픔」에서

차례

그리움
병에 담긴 편지

바보의 친구
어떤 이름들
비밀스러운 삶
나무들
밤 산책
함께 늙어가는 일
천장 영화관
우리는 고양이들처럼
한 사람의 스크루지
앵무새와 까치
용기 있는 순간들
모찌는 말이 없어서
한 손에는 책을

미노광
볼 수 없던 장면
있을 때 잘 해
자전거를 탄 우리들
우리의 언어
발코니가 있는 삶
우리가 함께 먹은 카레
똑똑한 전화기를 좋아하지만
옥상에 맡겨둔 유년
눈에 보이는 슬픔
잘 먹겠습니다
다 어디로 갔을까
기다림에 대하여
작지만 확실한 행복
따뜻한 비데에 앉아
너는 크고 뚱뚱한 고양이

박선아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공부했다. 《나일론》 매거진 피처 어시스턴트를 시작으로 《어라운드》 매거진, 안그라픽스에서 에디터로 일했다. 회사에 다니며 크고 작은 브랜드와 협업했고, 지금은 프리랜스 에디터 겸 아트 디렉터로 활동한다. 지은 책으로 『20킬로그램의 삶』이 있다. ‘작은 집에서, 넓은 사람과, 깊은 마음으로’ 살기를 꿈꾼다.
은 안그라픽스에서 발행하는 웹진입니다. 사람과 대화를 통해 들여다본
을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