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조차도 유래가 있는, 백의 현상학을 둘러싼 놀라운 논고
시대를 회전시키는 ‘백의 창세기’가 여기에서 시작된다
멀리 퍼져가는 세상의 움직임 속에서, 바로 그곳에 존재하는 일상 속에서, 디자인을 요구하는 징조를 민감하게 읽어내고 그 미지의 디자인 과제에 도전한다. 이미 주어진 틀 속에서 일하는 것이 종래의 디자이너라면 하라 켄야가 행하고 있는 것은 디자인을 바라는 장소를 새로이 발견해 그곳에 파고들어 가는 듯한 작업이다. 하라 켄야가 지나간 길목에는 언제나 디자인의 새로운 지평이 출현하는 흔적이 남아있다.
종이의 백, 추상적인 백, 물질로서의 백, 여백의 백
백의 발견
“세계 속의 도시는 지금 온갖 표현과 문화가 뒤섞인 끝에 ‘회색’으로 균질화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본연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고자 한다.” 이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하라 켄야는 디자인과의 일상의 격투 속에서 ‘백’을 찾아냈다. ‘백’이라는 색채가 지닌 본질의 힘을 최대한 끌어냄으로써 서로 뒤섞여 흐려진 회색 속에서 백은 부각된다. 자신만의 본연의 ‘백’을 만들어내기 위한 하라 켄야의 디자인 모색은 계속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백’은 결코 색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문화 속에 존재하는 감각의 자원을 밝혀내는 시도이다. 즉, 간결함과 섬세함을 낳는 미의식의 원점을 백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찾아보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백. 그것에는 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얗다고 느끼는 감수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을 찾아서는 안 된다. 백이라고 느끼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백이라는 감수성을 찾음으로써 우리는 평범한 백보다 더 하얀 백을 의식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 속에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게 깃들어 있는 백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 ‘고요함’이나 ‘공백’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거기에 잠재되어 있는 의미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백을 깨닫는 것으로 세상은 빛이 증가하고 어둠의 정도가 심화한다.
이 책을 읽은 당신은 이제 ‘백’이 단순히 하얗게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정말로 하얀 존재가 보다 강렬한 색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감각이 보다 풍부해지고 세밀해졌다는 증거이다. ‘벡’을 느끼는 감도가 향상된 만큼 세상의 암울한 정도도 증가할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