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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켄야에게 디자인을 묻다

“〈햅틱〉 전을 마치고 이제서야 겨우 디자이너로서 나만의 방법이 보였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것은 〈리디자인〉 전을 했을 때와 ‘일상’이라는 키워드와 만난 것이 기점이 되었다. 내게 디자인이란 무언가 굉장한 것을 만들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자아를 보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바꿈으로써 디자인의 원점이 무한하게 증가된다는 사실이다. 디자이너는 20대부터 30대까지가 혈기 왕성하게 활발한 활동을 하고, 40대가 되면 사고도 구식화되고 체력도 쇠퇴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그때부터가 진정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물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방식이나 방법론이 보이고, 자신의 생각을 세상 속에 표명하고, 거기에 공감해주는 사람이 일을 의뢰하고. 그렇게 사이클이 생기고 그때부터 겨우 나의 일이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디자인을 할 것이다.
나에게 디자인이란 한마디로 표현해 ‘소중한 질문’이다. 이 질문의 대답을 끊임없이 찾아감으로써 조금씩 문화의 의미가 밝혀지고, 삶에 긍지와 의욕이 만들어진다.”

편집자의 글

생명조차도 유래가 있는, 백의 현상학을 둘러싼 놀라운 논고
시대를 회전시키는 ‘백의 창세기’가 여기에서 시작된다

멀리 퍼져가는 세상의 움직임 속에서, 바로 그곳에 존재하는 일상 속에서, 디자인을 요구하는 징조를 민감하게 읽어내고 그 미지의 디자인 과제에 도전한다. 이미 주어진 틀 속에서 일하는 것이 종래의 디자이너라면 하라 켄야가 행하고 있는 것은 디자인을 바라는 장소를 새로이 발견해 그곳에 파고들어 가는 듯한 작업이다. 하라 켄야가 지나간 길목에는 언제나 디자인의 새로운 지평이 출현하는 흔적이 남아있다.

종이의 백, 추상적인 백, 물질로서의 백, 여백의 백
백의 발견

“세계 속의 도시는 지금 온갖 표현과 문화가 뒤섞인 끝에 ‘회색’으로 균질화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본연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고자 한다.” 이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하라 켄야는 디자인과의 일상의 격투 속에서 ‘백’을 찾아냈다. ‘백’이라는 색채가 지닌 본질의 힘을 최대한 끌어냄으로써 서로 뒤섞여 흐려진 회색 속에서 백은 부각된다. 자신만의 본연의 ‘백’을 만들어내기 위한 하라 켄야의 디자인 모색은 계속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백’은 결코 색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문화 속에 존재하는 감각의 자원을 밝혀내는 시도이다. 즉, 간결함과 섬세함을 낳는 미의식의 원점을 백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찾아보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백. 그것에는 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얗다고 느끼는 감수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을 찾아서는 안 된다. 백이라고 느끼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백이라는 감수성을 찾음으로써 우리는 평범한 백보다 더 하얀 백을 의식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 속에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게 깃들어 있는 백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 ‘고요함’이나 ‘공백’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거기에 잠재되어 있는 의미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백을 깨닫는 것으로 세상은 빛이 증가하고 어둠의 정도가 심화한다.

이 책을 읽은 당신은 이제 ‘백’이 단순히 하얗게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정말로 하얀 존재가 보다 강렬한 색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감각이 보다 풍부해지고 세밀해졌다는 증거이다. ‘벡’을 느끼는 감도가 향상된 만큼 세상의 암울한 정도도 증가할 테니까 말이다.

책 속에서

백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색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문화 속에 존재하는 감각의 자원을 밝혀내는 시도이다. 즉, 간결함과 섬세함을 낳는 미의식의 원점을 백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찾아보는 것이다.
나는 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있다. 전공은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이 아닌 ‘감성’을 만든다. 포스터, 패키지, 심벌마크, 북 디자인, 전람회 디자인 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만들어 왔는데, 이것들은 이른바 ‘감성’의 흔적과 같다. 나는 나의 작품을 얼마나 인상적으로 기억시킬 수 있을지, 얼마나 선명하게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을지 고민을 하며 일을 해 왔다. 즉, 어떻게 해야 세상 속 그리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특별한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런 일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나뿐 아니라 어쩌면 일본의, 또는 세계 문화 속에 축적되어 온 의사소통의 지혜와 비결 같은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로 공(空).엠프티네스(Emptiness)’, 즉 ‘텅 빈 공간’이라는 개념이 있다.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때에는 일방적으로 정보를 던지는 것보다 상대방의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쪽이 오히려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얼마나 많이 설득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들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질을 좌우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때로는 의도적으로 빈 그릇을 만들어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해 왔다. 예를 들면, 국기나 십자가 등의 매우 간결한 심벌은 어떤 의미를 상징하는 한정적인 기호라기보다는 그 심벌을 접한 사람들이 낳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속이 텅 빈 커다란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거대한 분묘나 교회 등의 공간 또는 다실이나 정원 등도 그중 하나에 해당한다.

「머리말」에서

차례

제1장 백의 발견
백은 감수성이다
색이란 무엇인가
이토시로시
색을 벗어난 색
정보와 생명 본연의 모습

제2장 종이
현저한 촉발 능력
하얀 판으로 태어나다
창조 의욕을 북돋는 매개물
되씹어 보는 백
하얀 사각형의 종이
언어를 접는다
문자라는 존재
활자와 타이포그래피

제3장 공백空白-엠프티네스Emptiness
공백의 의미
하세가와 토하쿠의 송림도 병풍
가능성으로서의 공백
이세신궁과 정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백 바탕에서 적색 원이 지닌 수용력
공과 백
다도
와시쓰의 원형
발상은 공백에 깃든다
독창적인 질문에 해답은 필요 없다

제4장 백을 향하여
퇴고
백을 향한 도전
청소
미지화
하얀 모래와 달빛

하라 켄야

1958년생. 디자이너, 일본디자인센터 대표이자 무사시노미술대학교 교수다. 일본뿐 아니라 세계 각지를 순회하며 영향을 끼친 〈RE-DESIGN – 일상의 21세기〉전을 비롯해 〈JAPAN CAR – 포화한 세계를 위한 디자인〉 〈HOUSE VISION〉 등 기존의 가치관을 뒤엎는 전시회를 전개한다. 나가노올림픽 개폐막식 프로그램, 아이치박람회에서는 일본 문화에 깊게 뿌리 내린 디자인을 실천했다. 2002년부터 무인양품 아트디렉터를 맡았으며, 마쓰야긴자, 모리빌딩, 쓰타야서점, 긴자 식스, 미키모토, 야마토운수, 중국 샤오미의 VI 디자인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한다. 2008–2009년에 베이징, 상하이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했다. 2016년 ‘밀라노가구박람회’에서 이탈리아 건축가 안드레아 브란치와 〈신 선사시대 – 100개의 동사(新·先史時代 – 一〇〇の動詞)〉전을 개최해 인류사를 도구와 욕망의 공진화로서 제시했다. 또 외무성 〈JAPAN HOUSE〉에서 종합 프로듀서를 맡아 일본 문화를 미래 자원으로 삼는 일에 주력한다. 2019년에 웹사이트 「저공비행 – High Resolution Tour」를 시작해 독자적인 시점으로 일본을 소개하면서 관광 분야에 새로운 차원의 접근을 시도한다. 지은 책으로는 『디자인의 디자인』 『백』 『내일의 디자인』 『마카로니 구멍의 비밀』 등이 있다.

이정환

경희대학교 경영학과와 인터컬트 일본어학교를 졸업했다. 리아트 통역과정을 거쳐 동양철학 및 종교학 연구가, 일본어 번역가, 작가로 활동 중이다. 『내일의 건축』『마카로니 구멍의 비밀』『연결하는 건축』 『삼저주의』『백』『디자이너 생각 위를 걷다』『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준비된 행운』 등 다수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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