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과 무의식, 보이는 것과 상상하는 것
생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디자인에 관하여
이 책 『멀티플 시그니처』는 디자인 그룹 투바이포(2×4)의 설립자이자 저술가 마이클 록(Michael Rock)이 엮은 담론집이다. 디자인을 특정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 문화적 맥락에 배치해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지은이는, 그동안 전개해온 여러 프로젝트와 경험을 녹인 저술을 통해 자신이 속한 디자인 문화를 진단한다. 이에 힘을 실어주는 건 저술, 디자인, 교육, 미술, 사진 등 각 분야에서 실무와 이론을 다루는 동시대 디자이너들의 목소리다. 그래픽 디자이너 얀 판토른, 건축가 렘 콜하스, 건축 저술가 마이클 스피크스, MoMA 디자인 디렉터 롭 지엄피에트로 등 필진 19인과의 대담은 시대와 세대를 불문하고 주목할 만하다. 한편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글과 생각을 명확하고 간결하게 옮긴 그래픽 디자이너 최성민, 최슬기의 번역과 원서에 충실한 구성이 책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본문에서 말하듯이 디자이너에게 ‘시그니처’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작업자의 서명을 뜻하기도 하고, 책의 물리적 구성단위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디자이너가 만들고 디자이너를 만드는 다각적 요소와 양상을 전면에서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은 독자가 관심을 둘 가치가 있다.
책 구성
첫 번째 키워드 작가에서는 아이디어를 디자이너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관행을 꼬집고, 그래픽 디자인이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실제 사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 편집, 저술, 디자인 등 입체적인 역할이 요구되는 디자이너가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다가 감독이 되고, 연기자 혹은 연주자가 되어 작품을 변주하는지 위트 있게 풀어낸 에세이, 그리고 인쇄 기술의 발달과 함께 변화해온 작가의 작품의 관계, 전업과 상품의 분리, 출판사의 등장, 컴퓨터가 가져온 변화를 정리한 챕터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작가에 실린 지은이의 글 중 디자인 작가에 관한 논의는, 발표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러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며, 디자인을 배우는 학생이나 디자이너로 일하는 이의 책상에 두루 어울리는 자료다.
두 번째 키워드 프로젝트에서는 다양한 클라이언트와 협업해 일군 투바이포의 작업물을 중심으로 한 풍부한 도판이 시선을 끈다. 기획과 작업, 결과물의 면면을 보여준다. 시대를 풍미한 매체들의 뒷이야기와 이념의 변화, 업계의 허와 실, 디자이너의 통념에 이르기까지 실무적 조언과 읽을거리가 빼곡하다.
세 번째 키워드 비평에서는 디자인계에 만연한 편견을 걷어내고 디자인의 가치를 재배치한다. “누가 진짜이고 아닌지는 결국 실천에 달린 문제”임을 지적하며 디자인을 하나로 규정하려는 시도 대신 디자인을 모든 사람이 여러 수준에서 공유하는 활동으로 볼 것을 당부한다. 한편 문화예술계 비평 무대에 비해 현저히 좁은 입지를 인지하면서도 제도적 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는 디자인 비평의 전망을 낙관하기도 한다. 디자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던 미국과 네덜란드를 비교하는 지은이의 강연 글, 1980–1990년대 유럽 디자인을 향한 미국의 애착과 당시 현대주의가 어떻게 이해되고 확장되었는지 보여주는 에세이도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서도 강조하듯이 “비평은 정답이 아니라 의견을 제시할 뿐이고, 의견은 다양해야 한다.“ 디자인 작업에 관한 다양한 시각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이 책이 비평서처럼 읽히는 이유다.
네 번째 키워드 독자에서는 언어와 시각이 디자인을 통해 어떻게 대중을 선동하고, 일반 독자가 사용자로 바뀌면서 발생하는 영향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시사한다. 박물관의 위상을 전복하고 장소의 맥락을 뒤흔드는 투바이포의 작업들이 특히 흥미롭다.
마이클 록이 이 책을 갈음하며 구축하는 디자인의 세계는 마치 계속되어야 하는 게임과 같다. 가볍거나 진지하거나, 낡거나 새롭거나 하는 기준은 없다. 형태가 먼저이니 내용이 중요하니 하는 논쟁도 핵심이 아니다. 다만 디자이너로서 즐거움을 잃지 않는 태도, 감각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모든 신경을 건드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다. 그는 어느 영화평론가가 한 말을 상기한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내용을 말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에게도 ‘어떻게’는 곧 ‘무엇’이다. 우리의 영구적인 내용은 ‘디자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