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 생명의 기운을 담은 틀
이 책의 원제는 『かたち誕生』이다. 여기서 우리 말 ‘형태’로 번역한 일본어는 가타치(かたち)이다. ‘가타(かた)’란 일종의 틀(型)의 개념으로, ‘사물의 외형이나 형상(形狀)을 결정하는 규범’을 의미한다. ‘치(ち)’는 자연에 있는 영적인 힘,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력의 작용을 의미한다. 스기우라 고헤이는 ‘가타’에 ‘치’가 더해져 살아 있는 ‘형태’로 그 모습을 바꾼다고 이야기한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라는 것은 그저 하나의 껍데기가 아니라 영혼의 힘을 품은 눈부신 무언가이다.
이 책에서 스기우라 고헤이는 현대 디자인이 지나치기 쉬운 ‘형태’와 ‘생명’의 관련성을 날카로운 눈으로 포착한다. 형태의 배경에 숨은 생명력과 풍요로움을 발견하기 위해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각 지역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그림을 탐구하였다. 그 결과 신화와 도상, 문양, 문자, 조각, 불교의 수인(手印) 속에서 생명이 깃든 형태가 탄생하는 순간을 찾았다. 형태의 미와 풍요로움을 발굴하는 지적인 고찰로 가득 찬 이 책을 문화인류학자 이와타 게이지는 ‘우주적인 앎의 경이로움’이라고 극찬했다. 과연 이 책을 읽다 보면 스기우라 고헤이야말로 “디자인 이론의 주어이고, 새로운 문화인류학의 대상”이라는 마쓰오카 세이고의 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의 구조와 호응하는 형태
1장부터 4장까지는 쌍을 이루고 하나로 융합하여 나아가 소용돌이치는 우주의 근본 원리를 파악한다. 우주에 있는 태양과 달은 각각 밝음과 어둠, 양과 음, 남자와 여자, 불과 물을 상징한다. 이런 요소는 천지 창조 신화와 관련되어 다양한 도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중국 신화의 우주개벽신인 반고의 한쪽 눈에는 태양이, 다른 쪽 눈에는 달이 있다. 일본에서도 이자나기 미코토의 왼쪽 눈에서는 태양(아마테라스), 오른쪽 눈에서는 달(즈쿠요미)이 생겨났다. 인도 신화의 우주대거신 크리슈나의 탄생을 묘사한 그림에도 양쪽 눈이 각각 태양과 달을 담고 있다.
태양과 달, 인간의 두 안구, 음과 양, 물과 불, 하늘과 땅. 이처럼 세상은 둘로 나뉘어 있다. 인간의 몸도 좌와 우로 나뉜다. 음과 양의 태극, 오른쪽 매듭과 왼쪽 매듭, 학과 거북 등 동양의 문화에서 ‘쌍을 이루는 형태’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불교의 만다라도 금강계와 태장계로 나뉜다. 쌍은 대립인 동시에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된다. 대극, 양계 만다라, 불과 물, 하늘과 땅은 영원히 분리된 채 대립하지 않는다. 둘로 나뉜 것이 한데 엉키는 소용돌이의 형태는 동서양의 수많은 그림과 장식에서 발견된다. 이집트의 연꽃, 이슬람의 아라베스크, 그리스의 팔메트, 중국의 당초. 소용돌이는 기의 흐름이고 생명의 뒤섞임이다. 물과 불이 섞이고, 하늘과 땅이 섞이고, 벼락, 덩굴줄기, 물고기, 거북, 학, 뱀, 용, 문어 등이 뒤섞이고 휘감겨 하나로 융합한다. 소용돌이는 DNA 이중나선에서 은하의 소용돌이로 확장된다. 신체와 쌍을 이루고 하나로 융합하며, 소용돌이치는 것에서 우주의 근본 원리를 만난다.
선이 만들어낸 기적, 문자의 탄생
5장에서 7장까지는 한자를 비롯한 ‘문자’의 탄생을 살핀다. 신체의 움직임이 선을 낳고 문자가 되며 그 리듬이 문자의 구조에 투영된다. 문자는 다시 태어나 고향인 자연으로 회귀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조망한다. 인간의 손은 다양한 기능을 하고, 따라서 성장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몸의 움직임이 선을 낫고, 그 선의 형태가 문자로 드러난다. 인간의 몸에 숨은 ‘힘’이 형태를 갖추어 드러난 것이 글자이다. 木(나무 목) 자는 땅 위에 드러난 나무의 형태뿐 아니라 땅속에 있는 뿌리까지 그려낸다. 대지의 풍양력을 빨아들이는 나무의 강력한 힘을 드러내는 木 자는 고대 중국인의 독자적인 생명관을 배경으로 탄생한 특색 있는 문자이다.
한자는 형식을 뛰어넘어 다양한 사물로 변신하고, 그 탄생의 원점으로 회귀한다. 壽(목숨 수) 자는 불로장생을 지향하는 도교 사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글자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영력을 발휘한다. 壽 자는 글자, 매듭, 그림, 분재, 향에도 등장하고, 술병, 의복, 인장에도 등장한다. 살아 있는 듯 행동하며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을 수놓는다. 신체의 움직임이 선을 낳고 문자가 되며 그 리듬이 문자의 구조에 투영되어 생명의 힘을 드러낸다.
미디어의 시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다
8장에서 10장은 ‘책’이나 ‘지도’라는 미디어의 시공간 속에서 형태가 어떻게 변용(變容)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살펴본다. 책은 한 장의 종이에서 시작한다. 종이를 접고 접으면 책이 된다. 종이가 두께를 얻고, 숨결을 얻은 것이다. 책을 펼치면 좌우로 갈라진 평면이 열린다. 그 안에는 선으로 이루어진 글자가 만들어낸 또 다른 선(글줄)을 따라 사건이 흐르고 이야기가 요동친다. 책의 표지를 만든다는 것. 장정(裝幀), 즉 책 디자인은 일반적으로 입는 것에 비유된다. 책의 표지에 내용을 드러내려는 시도는 새로운 책 디자인의 성과물을 낳았다. 책은 작은 형태 속에 다양한 힘과 우주의 총체를 집어삼키고 ‘치’의 힘을 표현한다.
사람이 걸어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이 이어져 길이 된다. 길이 뒤섞이고 교차하면 면이 되고, 그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지도가 된다. 시공은 상대적이다. 삶의 흔적을 바탕으로 지도를 다시 그리면 세계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된다. 시각에 의존하는 인간과 달리 후각이 극도로 발달한 개는 어떤 지도를 그릴 수 있을까? 냄새의 종류와 농도에 따라 인간이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지도가 펼쳐질 것이다. 맛도 지도로 표현할 수 있다. 음식을 입 안에 넣었을 때 퍼지는 맛의 형태를 시각으로 표현하면 세계의 다양한 음식 지도를 그릴 수 있다. 유연한 시공, 유연한 지도가 유연한 형태를 만들어낸다.
신체가 확장되어 우주를 삼켜버리다
마지막 11장과 12장에서는 형태가 다시 인간의 몸으로 회귀하고, 소우주인 인간의 몸이 대우주를 삼켜버릴 정도로 확장해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열 개의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짜 맞추어 하나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그중에 마치 산을 표현한 듯한 인상이 있다. 바로 수미산이다. 수미산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중심에 솟은 우주산이다. 세상의 중심이자 겉이고, 시작이자 끝이다. 수미산의 형태는 티베트의 불탑과 닮았다. 중력의 힘을 무시하고 폭발하듯 퍼져 있는 수미산과 불탑의 형태는 연꽃의 모양과 닮았다. 탁한 물에서 피어나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연꽃은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신앙의 대상이었다.
인도 신화의 비슈누와 크리슈나는 몸 안에 우주를 담고 있다. 두 눈에는 태양과 달이, 복부에는 인간계를 포함한 지상 세계가 있다. 발은 지하 세계를 딛고 있으며, 어깨에는 무수한 별이 반짝인다. 그 몸으로 우주를 담은 것이다. 티베트 불교의 최고존인 카라차크라 역시 몸 전체가 우주이다. 일본 도다이지의 대불은 수미산 세계를 담은 연꽃에 앉아 있다. 태국 왓포사원의 열반불은 발바닥뿐 아니라 신체 곳곳에 거대한 수미산 세계가 담겨 있다. 아시아의 신체상은 인체라는 조그마한 ‘형태’를 한없는 우주의 거대한 ‘형태’와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고, ‘대우주’의 본질이 인체라는 ‘소우주’ 전체와 조응하는 것으로 관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