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그라픽스

획: 글자쓰기에 대해

The Stroke : Theory of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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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획: 글짜쓰기에 대해』는 헤릿 노르트제이가 자신이 세운 글자의 이론을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도 간결하게 진술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서구의 각종 필기도구로부터 파생한 모든 글자를 포괄하는 독창적인 이론이 전개되고 있다. 노르트제이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 즉 글자사이나 개별 글자 속 흰 공간에서 시작해, 글씨를 쓸 때 획의 형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단계별로 상세히 기술하는 과정을 거쳐, 글자들의 궁극적인 특성을 분석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와 문화가 반영되고, 이들을 대하는 방법도 언급된다.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 글자는 ‘쓰는 글자 (글씨)’와 ‘타이포그래피적 글자 (활자)’로 격리된 채 따로 다루어져왔다. 노르트제이의 이론은 이런 분열을 바로잡는 데 기여한다. 그는 인쇄 방식이나 필기도구가 기술적으로 어떻게 변화했건 간에 모든 활자와 글씨에는 ‘쓰기’의 성격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자를 어떻게 쓰는가’식의 단순한 접근 방식을 초월하는, 이론의 실용적 단단함이야말로 이 책의 미덕이다.

편집자의 글

전통과 혁신을 공존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의 혁신
네덜란드 전통주의 타입디자인

네덜란드의 그래픽디자인은 ‘더치 디자인(dutch design)’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이미 활발하게 소개된 바 있다. 그와 달리 네덜란드의 타입디자인은 헤라르트 윙어르(Gerard Unger)의 『당신이 읽는 동안』이 번역된 정도를 제외하고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그래픽디자인은 현대주의의 세례를 강하게 받은 한편, 타입디자인은 분야의 특성상 전통주의적 성격을 지닌다. 타입디자인에서 전통주의자들은 현대주의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옛 글자체의 장점을 취하되, 단순한 복고에 반대하며 새로운 외관을 부여했다. ‘모트라(Motra, Modern Traditionalism)’라는 용어처럼, 그들은 전통과 혁신, 두 가치를 낡은 이분법에 따라 배타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균형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에서 타이포그래피의 새로운 정신을 찾으려 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헤이그 학파’를 이끈
교육자, 이론가, 타이포그래퍼, 타입디자이너

헤릿 노르트제이는 네덜란드의 전통주의 타입디자인의 가운데에 서 있는 인물로 1931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타이포그래퍼, 타입디자이너, 북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역사가, 성서학자, 저술가, 교육자로, 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 동안 네덜란드 헤이그왕립미술대학의 교수로 타입디자인을 가르치며 이 학교를 이 방면에서 세계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끌어올렸다. 에미그레(Emigre)의 루디 반데란스(Rudy VanderLans), 헤이그에서 타입디자인을 가르치는 페터 판 블록클란드(Petr van Blokland), DTL(Dutch Type Library)의 설립자 프랑크 블록클란트(Frank Blocklad) 등 유럽과 미국에서 중견 타입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수많은 제자를 배출해내면서 ‘헤이그 학파’를 형성하는 영향력을 미쳐왔다.

서구의 각종 필기도구에서 파생한
모든 글자를 포괄하는 독창적인 이론

이 책의 바탕은 노르트제이가 헤이그왕립미술대학에서 지도한 캘리그래피 실습 과정으로, 이 과정에서 글씨쓰기에 대한 그의 이론이 틀을 갖추어갔다. 캘리그래피는 조형적 특성에 주력하는 점 자체로 완결적인 목적을 지닌 손글씨로, 그의 이론을 통해 미적‧이념적 조건에 기대지 않고 매개변수를 사용해 글씨의 형태적 속성을 정밀하게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 밖에 그의 이론이 정식으로 소개된 것은 2000년대 초로, 한국에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출간된 지 30년이 지났음에도 이 책은 ‘역사적 설명’뿐 아니라 손의 움직임과 필기도구의 종류, 필기도구가 종이에 그대로 묻거나 압력이 가해지는 정도 등 ‘물리적 설명’으로 이론의 토대를 둔 점에서, 이 책은 보편성을 획득하며 시공간적 경계를 넘어 응용 가능성을 제공하고 영감을 준다.

“앞으로는 새로운 도구로 손글씨를 쓰는 일이 줄어들 것 같은데, 그렇다면 기존 글자가 디지털 디바이스에 최적화되는 방향 외에 새로운 형태적 요인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이제 웹이나 스크린으로 보는 폰트가 주도적일 텐데, 이런 상황에서 필기도구와 연관지어 타입을 개발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대학의 타이포그래피 수업 시간에 쏟아진 학생들의 질문이다.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에 속하고, 펜보다는 붓과 함께한 시간이 더 길며, (활자나 사진식자가 아닌) 디지털 타입의 시대인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획』에서 노르트제이가 말하는 바는 유효하다.

한국 독자를 위한 한국어판만의 배려

헤릿 노르트제이는 한국어판의 출간을 1985년과 2005년에 쓴 서문에 이은 「2014년 한국어판 서문」으로 담담하게 축하했다. ‘안삼열체’로 〈도쿄TDC애뉴얼어워드2014(Tokyo TDC Annual Award 2014)〉 타입디자인상을 받은 글자체디자이너 안삼열, 그래픽디자이너이자 그래픽디자인 듀오 슬기와 민의 일원인 최성민의 글은 한국 독자에게 다소 생소할 법한 본문으로 이끈다. 한편, 이 책의 옮긴이이자 타이포그래피 저술가 유지원의 해설은 헤릿 노르트제이의 발자취를 압축해 소개하며, 오늘날 한국에서 그의 이론을 대할 바람직한 태도를 제시한다. 노르트제이가 자신이 세운 이론을 위해 만든 용어를 정리한 「용어 일람」 역시 한국 독자를 위한 배려라 할 만하다.

추천사

펜의 작용과 쓰기의 과정을 직시하는 근원적인 통찰이, 그것도 이렇게 조그만 지면에서, 이토록 빛나는 경험은 다시 마주한 기억이 없다.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앞으로 누구도 이 책을 가볍게 여기지 못할 것이다.

요스트 호훌리 (타이포그래퍼)

노르트제이의 『획』은 필사에 기초한 글자를 활자로 옮기는 일에서 필기구의 운용 방식이 활자에 어떻게 적용되는지와 그에 기반을 둔 ‘쓰기’와 ‘그리기’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그의 이론은 ‘펜’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글을 비롯해 ‘쓰기’에서 출발한 모든 글자의 속성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준다. 이 점은 새로운 해석으로 글자를 그릴 때 단단한 기본이 되어 줄 것이다.

안삼열 (글자체디자이너)

노르트제이의 글자 이론은 활판인쇄 물신론자의 유치한 ‘물성’ 관념에서 몇 광년 진보한 독창적 유물론에 접근한다. 빼어난 유물론이 대개 그렇듯, 이 책의 궁극적 가치도 지난 역사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미래의 실천을 뒷받침하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획』은 펜촉의 움직임을 픽셀과 벡터와 코드의 운동으로, 지금 이곳에서, 해석해줄 독자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런 능동적 독자에게, 타이포그래피와 손글씨의 분석적 차이 또는 유사성은 별 흥밋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최성민 (그래픽디자이너,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책 속에서

캘리그래피는 조형적 특성에 주력하는 점 자체로 완결적인 목적을 지닌 손글씨이다. 이곳에서 수업 결과물을 평가하고 경험을 서로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글씨쓰기에 관한 나의 이론은 차츰 틀을 갖추어갔다. 이 이론을 이용해서 우리는 미적이거나 이념적인 조건에 기대지 않고도 매개변수를 사용해 글씨의 형태적 속성을 정밀하게 묘사해갈 수 있었다.

12쪽, 「2005년 영어판 서문」에서

글자에 관한 현행 연구들은 ‘단어’ 안의 ‘흰’ 공간이 아닌 개별 ‘글자’의 ‘검은’ 형상에만 주목한다. 그 결과 글자와 관련된 논의들은 피상적인 차이에만 전념하느라 기력을 소진하고 말았다. 각종 손글씨와 타입을 모두 비교할 수 있도록 아우르는 구심점은 개별 글자들의 검은 형상에 있지 않다. 타입의 검은 형상은 손으로 쓴 글씨의 검은 형상과는 너무 달라서, 엄밀히 비교하기에는 서로 맞지 않는 구석투성이다.

27쪽, 「글자의 흰 공간」에서

단어는 우리가 읽기라 부르는 것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이것을 이해하기는 쉽다. 대문자로만 짜인 신문이나 책을 상상해보기만 하면 된다. 대문자들이 제대로 조판되었다면, 글자사이의 간격은 고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글자 내부의 흰 공간들의 크기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단어다운 형상에는 이르지 못한다.

69쪽, 「단어의 발명」에서

노르트제이가 유발하는 논쟁은 매혹적이다. 때로 너무 과감해서 불편하게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의 이론이나 관점의 세부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의 통찰, 독창적 사유, 재치는 생생하게 반짝인다. 이것들이야말로 내가 한국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미덕이다.

145쪽, 「한국어판 옮긴이 해설」에서

차례

글자의 뒷면
글자의 유물론
1985년 네덜란드어판 서문
2005년 영어판 서문
2014년 한국어판 서문
용어 일람

  1. 글자의 흰 공간
  2. 프런트의 방향각도
  3. 단어
  4. 단어의 발명
  5. 단어형상의 정립
  6. 거대한 단절
  7. 굵기대비의 변화
  8. 글씨쓰기의 기술

영어판 옮긴이 후기
한국어판 옮긴이 해설
예문 목록

헤릿 노르트제이

타이포그래퍼, 타입디자이너, 북디자이너, 저술가, 역사가, 교육가. 1931년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생. 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 동안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타입디자인을 가르치며 이 학교를 이 방면 세계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끌어올렸다.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 중견 타입디자이너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해내면서 소위 ‘헤이그 학파’를 형성하는 영향력을 미쳐왔다. 저서로는 『문자 편지(Letterletter)』와 『일곱 자매들의 손(De handen van dezeven zusters)』 등이 있다.

유지원

책과 글자를 좋아하는 디자이너.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민음사에서 북디자이너로 일했다. 독일국제학술교류처 DAAD로부터 예술장학금을 받으며, 라이프치히 그래픽서적예술대학에서 타이포그래피를 전공하고, 홍익대학교 메타디자인 전문인력양성 사업단 BK연구교수를 지냈다. 이후 서울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타이포그래피와 편집디자인을 가르치는 동시에, 타이포그래피 연구 및 전시, 북디자인, 저술과 번역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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