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일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발견해 꼭 그것을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마치 반작용과 같습니다. 일이라는 거센 작용으로 단련되어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요리후지 분페이
평면의 세계, 입체적인 사람
일본의 철도회사 도쿄 메트로에 광고 포스터가 붙었다. 역이나 열차 안에서 지켜야 할 매너에 관해 일러두는 내용이었는데, 유머러스한 그림과 간결한 문구로 큰 공감을 얻었다. 이를테면 공공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일상적인 모습으로 재현하고 ‘집에서 하자’고 넌지시 말을 건네는 식이다. 논리를 탑재한 엄밀한 문장으로 지침을 전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두루뭉술하고 유연한 메시지가 필요한 법이다. 처음 광고를 시작한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매너 광고 ‘○○에서 하자(○○でやろう。)’ 시리즈 이야기다. 이 프로젝트의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일러스트레이션을 맡은 요리후지 분페이는 그림을 통해 자유롭게 사고하며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요리후지 분페이는 재치 넘치는 발상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이기도 하다. 자연스러운 태도로 세상과 대면하는 그의 작업은 인간적이고 유쾌하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만 지금의 결과물을 완성하기까지 그가 감내한 노력과 성실하게 쌓아 올린 시간에 대해 언급한 적은 드물다.
“나는 그를 디자이너가 아니라 ‘디자이너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존경한다. ‘표현의 완성’이라는 목표 지점에 집착하기보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을 포괄적으로 분석해 목표 지점은 저쪽일 거라며 이끌어주는 길잡이, 그가 바로 요리후지 분페이다.” —나가오카 겐메이(長岡賢明)
기다리고 체득하는 일
요리후지 분페이가 복기하는 자전적 이야기는 생생한 날것이다. 그림을 즐겨 그리던 꼬마가 디자인이라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고군분투하며 지금에 이르게 된 과정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다. 텔레비전도 마음대로 보지 못한 유년기, 치열한 경쟁 속에 보낸 학창 시절, 밤낮으로 로봇처럼 일만 하던 회사 생활, 디자이너로서 독립하여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기까지의 노력, 여러 사람과 의견을 조율해가는 과정,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방법 등 진솔하고 신랄한 에피소드가 쏟아진다. 요리후지 분페이는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을 하며 가끔 글도 쓴다. 그가 작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역시 아이디어를 ‘기다리는’ 일이다. 기다리고 만들면서 어느 정도 단련이 되고 나니,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렷해졌다고 말한다. 한편 기억의 조각들과 흩어진 말을 모아 글로 엮은 기무라 슌스케는 요리후지 분페이와 15년 전부터 인연을 이어온 전문 인터뷰어로,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에게 몰두할 수 있도록 조력하였다.
“나는 걸작이나 높은 기준을 달성하는 일만 노리다가 뜻대로 잘 되지 않아 결국 과제를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홈런 아니면 아웃이라며 9회 말까지 방망이 한번 휘두르지 않고 와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실무를 하며 움직일 수 없는 곳에서도 한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홈런을 치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눈앞에 다가오는 번트를 쳤다. 그러자 점차 홈런을 칠 수 있는 실력이 생긴 것 같다.” —요리후지 분페이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서는 시대
자기 자신을 잊을 만큼 앞만 보고 달려온 요리후지 분페이가 다시 출발선에 섰다. 잠시 걸음을 멈추어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아갈지 가늠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이 책이 완성되었다. 요리후지 분페이는 직업으로서의 디자이너가 점점 의미를 잃어간다고 말한다. 사회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어떤 경험을 축적해왔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일하는 방법이나 직업에 관한 조언이 아니다. 가까운 미래에 특정 직업보다는 ‘어떤 사람인가’로 자신을 규정하는 시대가 오리라는 기대, 연식이나 경험에 상관없이 다시 각자의 꿈을 꾸는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어떤 일에 성실하게 몰두하고 있다면 공감할 만한, 한 사람의 삶이 담긴 성찰의 기록이자 ‘체험적 직업론’이다. 그는 말한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아웃풋이 아니라 내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을 아웃풋 하는 기술이 여러 사람을 구할지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