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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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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연수의 첫 번째 여행 산문집

『언젠가, 아마도』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에 연재한 글과 새롭게 발표하는 글 8편을 더하고 가다듬어 엮은 책이다. 단순히 여행의 기록을 담은 기행문도, 사적인 감상에만 치중한 에세이도 아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방문한 타지에서 혹은 어딘가로 향하는 길 위에서, 그도 아니면 여정이 끝난 뒤에 마주하는 어떤 순간을, 저자는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가만히 품고 있다가 하나씩 길어 올려 글로 풀어냈다. 어느 순간 문득 일상 속에서 떠오른 여행의 기억, 그때 그 여행지에서의 감정을 마주하고 지긋이 응시하듯이.

장소는 몽골, 러시아,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태국, 일본, 이란, 중국, 실크로드 등 해외의 여러 지역과 순천, 부산, 대구 등 국내 도시를 넘나든다. 때론 비행기의 이코노미석, 때론 부산의 택시나 서울의 버스 안 일 때도 있고, 최근 여행은 물론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오르기도 한다. 그 이야기들의 공통점이라면 ‘여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 한 편의 제목처럼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말이다. 그러니까, 소설가 김연수의 여행기인 듯 (우리가 흔히 아는) 여행기가 아닌 58편의 이야기는 외로움, 낯섦, 그리움, 위안, 안도, 희망 등 여행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모든 감정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여행의 의미, 나아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겠다. 언뜻 서늘한 여름 저녁, 노천 술자리에서 펼쳐지는 수다거리마냥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같지만, 곱씹을수록 씁쓸한 단맛과 심심한 재미가 우러나는 여행담. 그리고 언젠가, 아마도 우리를 다시 길 위로 이끌 그런 이야기.

편집자의 글

천천히 길어 올린 여행의 기억

흔히 여행은 설레고 즐거운 것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처럼, 여행 또한 막상 떠나보면 기대했던 것과 꼭 같지는 않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 발을 동동 구르고, 아무도 없는 타지에서 전에는 몰랐던 지독한 고독을 맛보기도 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타인의 존재에 당혹감을 느끼기도 한다. 게다가 여행이 끝난 뒤에도 변함없는 현실, 고민, 걱정거리를 확인하고 나면, 그 여행마저도 완벽한 도피나 해답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소설가 김연수에게도 마찬가지다. 여행은 설레고 즐겁고 짜릿하기보다, 외롭고 외로우며 또 외로운 시간의 터널처럼 보인다.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끼니를 해결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고(‘리스본의 밤에 듣는 파두의 매력’), 인파로 북적이는 관광지는 휴일의 놀이공원과 다를 바 없으며(‘유네스코 지정 외로운 세계 여행자’), 호텔 방은 이 세상에 오직 혼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재확인하는 장소다(‘체크인과 체크아웃 사이에 겨우 존재하는 것들’). 그는 늘 그 외로움을 ‘통과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밤베르크에 석 달을 머무는 동안 저녁이면 리슬링 와인을 친구 삼았고(‘외로움도 너의 것이야’), 옌지에서는 호텔 커피숍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단.독. 여행’). 마드리드에선 노트북 충전등에 숨은 의미를 발견하기도 했다(‘위로의 테크놀로지’).

물론 그의 여행이 늘 외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뜻밖의 못한 사건(‘처음이자 마지막일 낙타고기의 맛’)도 있고, 잊지 못할 만남(‘아름다운 모스크 아래의 소녀들’)도 있다. 때로는 호텔 비누의 행방을 궁금해하고(‘그 많은 비누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장거리 비행 중 이코노미석에서 시간 보내는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한다(‘이코노미석에 앉아 조종사의 눈으로’). 이처럼 여행이란 낯선 감정과 사람, 경험을 통해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던 것을 새롭게 바라보고, 깊숙이 묻어둔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며, 뜻밖의 깨달음을 얻는 기회이기도 하다. 특히나 타인의 삶을 그려내는 소설가를 업으로 삼고 있는 저자에게 여행이란 어쩌면 자발적으로 선택한 낯설고 고독한 상황에서 외롭고 무력한 상태의 ‘낯선’ 나를 마주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타인을, 나아가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저자가 또 다른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고,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어 ‘누군가’를 만나기를 희망하는 이유이리라.

책 속에서

내가 아는 한, 한국에서 가장 완벽하게 잠적하는 방법은 인천공항에서 더반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뒤, 다시 자동차로 앰피시어터 백패커스 로지로 가는 일이다. 거기에는 맥주 마시기 좋은 바가 있으니까 사흘 정도 지내면서 곰곰이 생각해본 뒤에 그래도 정 잠적하고 싶다면, 드라켄즈버그산맥을 넘어 레소토로 입국한다. 도중에 사니 패스의 정상에서 맥주 1잔을 마시는 걸 빼먹지 마라. 그 이후의 맥주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으니까.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지는 방법」, 20쪽

여행이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라고. 그러고 보면 여행을 통해 나는 비정함을 익혔다. 눈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토록 찬탄하던 곳과 작별하는 법을 알게 됐으니까. 이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친구처럼 지낸 이들과도, 또 아꼈으나 잃어버린 물건과도 아무런 미련 없이. 이젠 알겠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이 삶의 원리를 배웠다는 사실을. 그레이트! 베리 굿! 다만 그뿐이라는 것. 떠나는 순간에 아쉬움이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

「떠나는 순간까지도 아쉬움은 남지 않게」, 28쪽

여행하는 내내 나는 그 많은 호텔 비누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건 마치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질문처럼 느껴졌다. 심각하고 복잡해진다면, 정답일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 많은 호텔 비누는 제대로 씻지 못해 질병에 시달리는 제3세계 아이에게 간다. 정말이지 이건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멋진 정답이다. 비누는 계속 청결의 상징이 되어야겠다.

「그 많은 비누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32쪽

혼자서 여행하는 일의 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거기, 고단함에.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막막하다. 책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걷고 또 걸어도 시간은 좀체 흐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관광지를 둘러보다 보면, 세상의 모든 관광지란 홀로 여행하는 자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단. 독. 여행」, 40쪽

그건 아마도 모든 인간의 소망과 꿈은 서로 닮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소망과 꿈의 운명도 대개는 비슷하다. 멀리서 바라볼 때 라스베이거스가 신기루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까닭은, 결국 대개는 패배할 운명이라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소망하고 다시 꿈꾸는 일이 바로 인간의 일이기 때문이리라.

「꿈꾸고 소망하는 일, 사람의 일」, 44쪽

세월호가 침몰한 뒤, 그 사고가 수학여행 때문에 벌어지기라도 한 양 모든 수학여행이 취소됐다. 대체 수학여행이 무슨 잘못일까. 낡은 배가 기울 정도로 화물을 실은 게 침몰의 원인이라면 그렇게 한 선사가 문제지. 또 그렇다 한들, 폭격으로 순식간에 침몰한 것도 아닌데, 인명을 구조하라고 만든 국가기관이 승객을 구하면 되지 않았나. 여하튼 수학여행은 무죄니, 선사와 국가가 책임지기를. 누가 뭐래도 수학여행은 꼭 필요한 것이니까.

「수학여행은 무죄다」, 134쪽

조직은 인간을 난쟁이로 만든다는 것, 고독은 우리의 성장판이라는 것,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해야 할 일을 할 때 인간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는 것. 비록 나는 안중근의 손가락은 찾지 못했지만, 그의 여정이 내게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안중근의 손가락이 내게 들려준 말」, 138쪽

대개의 경우 내게 독서는 12시간 동안의 비행과 같은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는 좋은 취미생활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자유는 남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한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는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책들이 있는 게 아닐까? 원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 이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이코노미석에 앉아 조종사의 눈으로」, 142쪽

그 기분이 최고조에 달할 때는 멀리서 터널이 보일 때다. 차의 가속페달을 밟아 옛 기차 터널 속으로 들어가니 블랙홀을 향해 돌진하는 우주선 선장이 된 듯한 기분이다. 반대편 멀리 터널의 끝이 보인다. ‘난 아마 다른 평행 우주로 튕겨 나올 거야.’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터널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그러니까 그 터널을 지나가려는 또 다른 자동차다. 역시 이 우주라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 또 이 우주라니 아쉽기도 하다.

「터널을 빠져나와도 다시 이 우주라니」, 182쪽

그럼에도 몇 번의 달리기는 성공적이었다. 지난여름, 일본 미나미아소에서 아소산을 바라보면서 달린 길은 너무나 평화로워서 인상적이었다. 누군가 내 모습을 찍었다면, 그대로 《러너스 월드》에 보내도 좋을 만큼 풍경이 아름다웠다.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샌프란시스코만을 바라보면서 달린 일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이어폰에서 리 오스카의 ‘San Francisco Bay’가 흘러나왔는데, 그 순간 나는 그 노래를 완전히 이해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치로운 달리기」, 206쪽

차례

작가의 말

여수에서는 군침이 돈다
변하는 것만이 영원하다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지는 방법
오르골의 법칙, 도루묵의 법칙
떠나는 순간까지도 아쉬움은 남지 않게
그 많은 비누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우린 모두 젊은 여행자
단. 독. 여행
꿈꾸고 소망하는 일, 사람의 일
천국에서 다시 만나잘까, 내가 사랑한 그녀
외로움도 너의 것이야
아름다운 모스크 아래의 소녀들
이게 청춘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모든 삶을 다 살 수 없으니 나는 연필을 사겠다
이코노미석에 앉아 조종사의 눈으로
사막조차 피로 물드는 시대의 도피처
순천만에서 바다의 대답을 듣다
그대로 옮긴 ‘기분 좋은 발음’
다른 세상으로 가는 완행열차
나가사키의 특별한 라스트 드링크
멸종 위기에 놓인 ‘낯선 사람’
밀물처럼 밀려오던 리스본의 노스탤지어
롯폰기에서 한국 음식 맛보기
다시 돌아와 내 눈 앞에 선 코끼리
남산타워가 파란색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세상이라니
페르시아, 사람은 배짱이라는 이상한 결론
여행의 불편함은 시차 같은 것
이제 다시 맛보지 못할 해피 스모킹
위로의 테크놀로지
수학여행은 무죄다
안중근의 손가락이 내게 들려준 말
이코노미석은 지상, 아니, 천상 최고의 창작 공간
두바이에서는 나도 만수르인 양
길고 긴 하얼빈의 밤에는 소설을 읽어야죠
부산의 택시기사들과 지구 끝까지
오래전에 살라망카를 떠나왔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일 낙타 고기의 맛
카프카의 불 피우는 기술
소설가가 여행지에서 제일 많이 하는 짓
모처럼의 여행인데 비가 내려 짜증 난다면
터널을 빠져나와도 다시 이 우주라니
보이는 대로 볼 때 보이는 것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가?
국제시장이 있으니 부산은 국제도시
지금 진보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리스본의 밤에 듣는 파두의 매력
세상에서 가장 사치로운 달리기
체크인과 체크아웃 사이에 겨우 존재하는 것들
유네스코 지정 외로운 세계 여행자
지구가 하나뿐이라 다행이야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노이의 아침에
세상이 변해도, 장소가 바뀌어도 여전한 것
사진으로 다 전하지 못하는 이야기들
하나의 나로만 살아가는 건 인생의 낭비
베이징의 옥류관에서 ‘휘파람’을 듣고 싶다
여행지에서 이따금 볼 수 있는 빛
기다리면 저절로 희망이 생겨난다
모든 게 끝났으니 진짜 여행은 이제부터

김연수의 여행에 함께한 책과 영화, 그리고 음악
첫 독자의 말

김연수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으로 2001년 동서문학상을,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2003년 동인문학상을,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2005년 대산문학상을, 단편소설 「달로 간 코미디언」으로 2007년 황순원문학상을, 단편소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2009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장편소설 『7번국도 Revisited』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원더보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소설집 『스무 살』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 『우리가 보낸 순간』 『지지 않는다는 말』 『소설가의 일』 『시절일기』 『대책 없이 해피엔딩』(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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