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좋네, 노인력.
건망증 이즈 뷰티풀.
1990년대,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도쿄신문》 문화란에 한 신조어에 관한 에세이를 기고했다. 그 에세이는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며 잡지 《지쿠마》 연재로 이어졌고, 1998년 9월 에세이를 엮은 단행본이 나오자 출판사에는 ‘지금까지 상상도 한 적 없는’ 문의가 쇄도했으며, 일본에서 매년 연말 꼽는 ‘신어·유행어 대상’ 최종 10개 후보에 오르며 그 화제성을 입증했다. 이 신조어는 예상하시다시피 이 책 『노인력』의 제목과 같다.
처음 ‘노인력’이라는 말을 발안한 것은 ‘노상관찰학회’의 건축가 후지모리 데루노부와 일러스트레이터 미나미 신보로, 이들의 발견에는 소재가 있다. 바로 아카세가와 겐페이 자체다. 후지모리 데루노부와 미나미 신보는 발견자,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발견(의 매개)물인 셈이다. “소재인 내 안의 어떤 무언가에서 이 두 사람이 노인력을 발견했다.” 여기서 어떤 무언가는 우리가 흔히 노망, 망령, 치매 같은 말로 불러온 것이다. 두 사람보다 나이가 많은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내가 먼저 노망 노인이 되는 게 당연하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며 “이런 호칭으로 불려도 별로 거부감은 없다.”라고 하지만, 정작 부르는 사람들은 마음에 걸리기 마련이다. 앞선 말들에는 노화의 성질을 비하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발견자 두 사람도 나이를 먹으며 차차 노화의 성질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름이나 용건, 약속 따위를 잊어버리는 게 일상이 되고 몸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겼다. 일본은 유교 국가가 아니지만 역시 윗사람을 노망 노인이라고 부르는 건 찜찜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찾아낸, 더 나은 표현이 ‘노인력’이다. “이렇게 해서 인류는 처음으로 노망을 하나의 능력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위험해도 노인력
오용해도 노인력
책에서 꼽는 노인력의 특징으로는 건망증뿐 아니라 한숨도 있다. 어딘가에 앉을 때 “아고고고, 읏샤.” 하며, 앉고 나서는 “아-아.” 하고 한숨을 쉰다. “보통의 ‘읏샤’는 아직 힘쓰는 일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 앞에 ‘아고고고’가 붙으면 노인력이라고 보아도 틀림없다.” 여기에 “아-아.”가 붙으면 더 적극적인 노인력이라고 설명한다. 식후 차 한 잔을 마시며, 하루의 끝에 맥주 한 잔을 마시며,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그며, “아-아.” 하고 한숨을 쉬어서 피로를 내보낸다는 것이다. 첫 한숨은 무의식중에 나오더라도, 그 후에 다시 한번 한숨을 쉬면 일부러 피로를 내보내기 위해서다. “적극적인 조로의 힘이라고 할까. 거기에서 노인력에 대한 의욕 같은 게 느껴진다.”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장난스럽게 풀어내고 있지만, 노인력은 사실 위험하다. 증가할수록 죽음에 이르는 마이너스의 힘이다. 책에서 저자는 응급실에 실려 가는가 하면, 그의 동료들과 함께 건강검진을 받는 장면도 수차례 등장한다. 노인력이 높아질수록, 즉 노화가 진행될수록 정기적인 건강검진은 중요한 법이다. 그런데 담당 의사는 “착실하게 노인력이 증가 중입니다.” “노망이 중간에 멈추는 일 없이 확실하게 유지될 겁니다.” 같은 말을 한다. 노인력은 결국 농담이다. 근래 주목받은 ‘실버 센류’에서 엿보인 것이 바로 노인력이다. 노인력은 스스로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도, 그 사실을 무겁지 않게 알려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노인력은 마이너스의 힘인데, ‘노인이 지닌 물리적 에너지의 양’으로 잘못 해석해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오용되곤 한다. ‘아직은 젊은 사람에게 지지 않는다.’ ‘아직은 이 정도 짐은 문제없다.’ ‘아직은 밤샘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아직은 술 한 병이야 거뜬하다.’ 이는 노인이 자기를 쥐어짜 발휘한 플러스의 힘으로, 흔히 운운하는 노익장에 가깝다. 물론 나이를 먹어도 기력이 넘친다면 엄청난 일이지만, 이런 힘은 언젠가 약해진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물이 필연적으로 그렇다. “거기서 “약해질 수 없어!” 하면서 저항하는 대신 “이것은 약해지는 게 아니라 힘의 변화다.”라고 생각하는 게 노인력이다.” 다만 저자는 이런 오용 사례가 넘쳐나는 것조차, ‘그것이 말의 숙명’이라며 받아들인다. 이런 일에 하나하나 기를 쓰고 해명하기보다 가볍게 넘기는 것 또한 노인력이 만연해진 이의 일상일 것이다.
한국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노인력
한편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노인력이 일본의 독자적 힘이 아닌지 고찰한다. 서양에서 맥주를 마시며 한숨을 쉬는 건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다만 이 부분에서 꼼꼼하고 끈기 있는 연구 보고를 기다린다고 했으니, 한국의 노인력을 찾아보았다. 같은 동북아라 그런지 한국도 곳곳에서 노인력이 발견된다. 성별을 막론하고 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그, 저 사람, 있잖아, 그 있잖아.” 하며 한참 헤매본 사람은 알 것이다. 종래에는 이름을 떠올리려는 노력조차 포기하고 심지어 “얘, 저기야.” “누구야.” 그냥 이렇게 대명사로 불러버리기도 한다. 노인력을 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또 한국인 누구나 공감할 만한 노인력이라고 하면 역시 ‘물건 찾으며 노래 부르기’가 아닐까 싶다. 자잘한 잡화를 찾으며 ‘양말이 어디에 있나.’ ‘휴대폰을 어디다 뒀을까.’ 혼자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듣는 사람도 없는데 입 밖으로 내 혼잣말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노인력이 느껴지건만, 한술 더 떠 중얼거림에 곡조를 붙여버리는 것이다. 대체로 특별히 정해진 게 아닌 정체불명의 곡조다. 이러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즐거워지므로, 좋은 기분이 여운으로 남아 물건을 찾지 못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어딘가에는 있겠지, 언젠가 찾을 수 있겠지, 아무것도 급하지 않다는 듯이 못 찾은 채 둔다. 잊은 것도 노인력, 잊어버렸는데 여유 부릴 수 있는 것도 노인력이다.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프로야구에서 노인력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힘을 빼려면 힘을 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노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노인력이 생겨 힘이 빠진다. 하지만 젊었을 때는 자연스럽게 힘을 뺄 수 없다. 의식해서 힘을 빼야 한다. 즉 의식적으로 노인력을 미리 발휘해야 한다.” 이때 한국의 동네 수영장도 좋은 예다. 힘을 빼야 물에 뜬다고 하지만 대부분 젊은이로 구성된 기초반 사람들은 도통 힘을 뺄 줄 모른다. 힘을 빼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숙련반은 거의 노인이 포진해 있다. 그들은 힘을 뺄 줄 안다. 노인력이 충만한 곳이다. 한국의 동네 수영장은 수영도 배울 수 있지만, 무엇보다 노인력을 배우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의 저속노화와 함께
정신의 저속노화를
이 책의 말미에 이르러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노인력이 예술임을 선언한다. 텔레비전 방송을 위해 노인력이 구현된 사물을 찾아다니며, 낡고 묘하고 좀스러운 물건을 발견할 때마다 웃다가 “이것은 예술이라고밖에 할 수 없네요.”라는 말을 하고 만 것이다. 노인력은 현역에서 벗어난 세상의 역학인데, 예술 또한 현역에서 벗어나 있다. 생산성이 없고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또 다른 방면에서는 빠릿빠릿하다. “정·재계에서 본다면 예술은 노망스러움이나 휘청휘청이나 망령이나 배회노인 아닌가.” 예술이라고 하니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한 마을에서 발견한 “노인은 집의 수호신” 입간판의 존재도 떠오른다. 공항 반대 운동을 위해 준비한 입간판인데, 사용하기도 전에 반대 운동이 이기는 바람에 잔뜩 남은 입간판에 뭔가 의미 있는 문구를 적어서 마을에 세워두었다고 한다. 이 입간판은 쓸모없지만 잘 보존된, 일종의 ‘초예술 토머슨’ 아닌가 싶다.
“이렇게 노인력은 귀중하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데도 의외로 모두가 싫어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로불사를 향한 열망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늙는 것과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 실버산업이 호황이라고는 해도 더 이상 생산할 수 없고 사회에 기여할 수 없는 노인의 존재는 사실상 소외되며, 노인 그 자신도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러나 늙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누구나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한편에서는 ‘저속노화’ 바람이 부는 세상, 신체의 노화를 늦추는 것은 물론 유의미하다. 하지만 노화 그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노인력의 개념은 유쾌하게 늙어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이는 곧 세대 사이의 간극을 줄이며 사회적으로 정신의 저속노화를 실현한다. 이를 통해 노인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면, 언젠가 우리 모두가 노인이 되어 살아갈 세상을 더 낫게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