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변화의 시대, 디자이너의 역할은 무엇인가
인류는 유한한 지구 자원의 한계에 맞닥뜨렸고, 산업시대의 소비문화는 그 한계점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다. 이제 인류에게는 두 가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하나는 인류에게 주어진 자원과 환경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에 눈감은 채 무한정 욕구를 충족하는 기존의 세계이다. 또 다른 세계는 지구의 한계를 깨닫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나서는 세계이다.
거대한 변화를 앞둔 세상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제품을 설계하거나 외양을 꾸미는 전통적인 의미에 머물러선 안 된다. 한때 디자이너가 사회혁신에 공헌하는 방법은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거나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생산 방식을 선택하는 것 등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이제 디자이너는 생산물 혹은 생산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설계하고 조직해야 한다. 지역과 공동체, 나아가 인류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와 삶을 디자인해야 하는 것이다.
전문 디자이너는 특정한 디자인 훈련을 거치고 특정한 지식과 도구를 갖추어디자인 과정에서 전문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사회혁신 과정에서 수많은 아이디어를 더욱 효과적으로 접근하고 확산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전문 디자이너는 다양한 시나리오에 참여하여 공동의 비전으로 모일 수 있도록 확실한 동기를 제공하는 가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모두가 디자이너가 되는 시대의 디자인
사람들은 누구나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고 꾸미는 보편적 디자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새로운 네트워크 기술을 이용한 오픈 소스 운동이 더해지면 개인의 디자인 능력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세계를 위한 사회혁신은 소수의 전문 디자이너 개인이 추진할 수 없다. 열린 네트워크 세상에서 개인의 재능보다는 공동체가 발휘하는 지혜가 새로운 활로를 마련해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디자인은 제품을 만들거나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아프리카 식수 문제를 해결하고, 노인 돌봄 네트워크를 만들 수도 있다. 자동차와 집을 공유하고, 청년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기도 한다. 공터에 정원을 만들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지역 공동체 회의를 열어 지역민의 유대 관계를 깊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도시 거주민과 시골 농부를 연결하여 안전한 먹을거리와 안정적인 판매망을 구축할 수도 있다. 정신질환자를 병원에 가두는 관행에서 벗어나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고 잠재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모든 사회혁신 활동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유지하는 것이 바로 모두가 디자이너가 되는 시대의 디자인이다.
작고 지역적이고 열려 있으며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나리오
새로운 시대의 디자인은 거시보다는 미시에 집중한다. 에른스트 슈머허가 거대화의 흐름에 반발해 『작은 것은 아름답다』를 남겼듯이, 같은 이유로 이제는 작은 규모와 지역적인 특성에 집중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작은 규모와 지역에 집중하는 것은 네트워크 기술로 온 세상이 연결된 덕에 가능해졌다.
새로운 디자인은 ‘작고(Small) 지역적이며(Local) 열려 있고(Open) 연결된(Connected)’ 특성을 가진 디자인이다. 이를 SLOC 시나리오라고 한다. SLOC 시나리오는 많은 사회 주체가 이미 시작된 변화의 흐름을 강화하고 시너지를 만들어냈을 때 그려보일 수 있는 미래의 비전이기도 하다. 작고 지역적인 디자인은 소규모 지역 공동체의 유대를 높여준다. 이는 분산화되고 회복력 있는 사회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아울러 폐쇄적이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네트워크 시스템을 통해 연결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디자인이 세계적인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증명한다.
지역과 문화의 특성에 따라 정교하게 설계한 소규모 프로젝트를 확산시켜 세상의 변화를 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회혁신 디자인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만나는 사회혁신 디자인
이 책에는 지금 현재,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혁신을 시도하고 있는 여러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카셰어링을 들 수 있다. 30년 전 차가 필요한 사람과 차를 놀리기 싫은 사람을 연결하는 서비스였던 카셰어링은 이제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회 서비스이자 비즈니스가 되었다. 카셰어링에 맞게 개조된 자동차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스마트폰의 등장은 카셰어링 문화의 성장과 진화에 기폭제가 되었다.
중국의 광시성 류저우에는 아이농휘라는 농민조합이 있다. 이 조합은 농민과 시민을 연계해 안전한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공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처럼 도시 그리고 도시에서 가까운 시골이 유기농 먹을거리의 생산과 공급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공동체지원농업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주거가 불안정한 청년과 노인이 함께 가꾸어가는 호스팅스튜던트, 이웃 공동체 활동의 활성화를 꾀한 밀라노의 협동주거 프로그램, 캐나다의 의료 서비스를 위한 디지털 플랫폼, 인도의 양방항 스토리텔링 프로젝트까지 다양한 사례가 있다. 이 사례들은 전문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협동적 디자인을 지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