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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닝 프로그램스: 프로그램으로서의 디자인

Designing Program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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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디자이너이자 예술가 카를 게르스트너Karl Gerstner(1930-2017)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타이포그래피,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와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게르스트너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작업으로 꼽히는 『디자이닝 프로그램스』는 네 편의 이론적 글을 모은 선집이다. 다방면에 걸친 교육을 받고 비판적 사유를 펼친 그는 이 책에서 컴퓨터 시대 초기 디자인의 기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해당 작업에 대한 모든 심미적 결정을 주관하게 될 혁신적인 법칙이나 시스템을 제안했다.

편집자의 글

카를 게르스트너의 위대한 유산,『디자이닝 프로그램스』

스위스의 대표 디자이너이자 예술가 카를 게르스트너Karl Gerstner(1930-2017)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타이포그래피,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와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방면에 걸친 교육을 받고 비판적 사유를 펼친 게르스트너는 1950년대에 운 좋게 현대 미술 혹은 디자인 운동의 선구자인 에밀 루더, 아르민 호프만, 한스 핀슬러, 막스 슈미트, 프리츠 뷔흘러, 마르쿠스 쿠터, 막스 빌, 마르셀 비스, 리하르트 파울 로제, 페레나 뢰벤스베르크 등과 만나며 협업했다.

27세에 쓴 첫 책 『차가운 예술?』을 통해 자신의 관심 분야를 규정하며, 구체미술 대표 작가 4인의 작품 속 수학적, 구축적 개념을 처음으로 심층 분석했다. 예술가로서 체계적인 색채와 형태 언어를 구축한 그의 작업과 세계관은 분석적 사고와 체계적인 이해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그는 항상 예술과 과학을 가까이하고자 했다.

1963년 게르스트너는 파울 그레딩거, 마르쿠스 쿠터와 함께 전설적인 광고 에이전시 GGK(Gerstner, Gredinger and Kutter)를 설립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세간의 이목을 끄는 홍보 캠페인을 펼치며 미국식 광고 전략에 새로운 디자인 방법론을 철저하게 적용함으로써 스위스에어, 부르다, 랑겐샤이트, IBM 등 여러 기업 아이덴티티를 디자인했다. GGK는 대담하고 도발적인 텍스트를 전경화한 ‘통합적 타이포그래피’를 선보였는데, 이는 특화되어 오늘날의 ‘기업 아이덴티티’나 ‘브랜딩’이라는 분야가 된다.

게르스트너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작업으로 꼽히는 『디자이닝 프로그램스』는 네 편의 이론적 글을 모은 선집이다. 아루투어 니글리에서 1963년에 독일어 초판이, 1964년에 영문판이 출간되었고, 2007년에 라르스 뮐러 출판사에서 영문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디자인 개념과 방법론을 전달하는데, 이는 현재의 발전 상황을 볼 때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컴퓨터 시대 초기 디자인의 기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해당 작업에 대한 모든 심미적 결정을 주관하게 될 혁신적인 법칙이나 시스템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1973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designing programs/programming designs»를 기획한 건축가 에밀리오 암바스는 “디자이닝 프로그램스란 배열을 위한 원칙을 창안하는 것”이라고 했다.

‘디자이닝 프로그램스’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각각의 문제에는 다양한 해결책이 존재하며 그중 한 가지를 특정한 상황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다. 이 책은 삶에 대한 실천에 관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루며, 그래픽, 사진, 음악, 문학, 미술, 타이포그래피에서 나온 많은 사례에서 독자가 소재를 포착하고 발전시켜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체계적인 사고, 그리드 구조, 학제간 접근 방식 등은 여러 세대의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었고, 카를 게르스트너의 영향력은 자신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넘어 그래픽 디자인 역사에서 확장되어 지속한다.

현대 그래픽 디자인이 태동하던 시기에 수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과연 무엇을 추구하고 예견했을까. 그리고 실제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는가. 어떤 생각이 실현되었고 어떤 생각이 잊혔는가. 서울시립대학교 최성민 교수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60년 만에 출간된 『디자이닝 프로그램스』 한국어판에서 “60년이라면, 역사적 맥락에서 원작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는 데 필요한 비판적 거리가 적당히 확보된 시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답한다.

추천사

(전략) 그러므로 『디자이닝 프로그램스』는 무엇보다 역사적 기록으로서 가치 있는 책이다. 전문적 현대 그래픽 디자인이 태동하던 때에 그들은 무엇을 꿈꾸고 어떤 야심을 품었는가. 무엇을 추구하고 예견했으며, 실제 역사는 그들의 지향이나 전망과 비교해 어떻게 흘러갔는가. 어떤 생각이 어떻게 실현되었고 어떤 생각은 잊혔는가. 원서가 나온 지 60년 만에 번역 출간되었으니, 실천에 당장 적용할 만한 지침으로 쓰기에는 좀 뒤늦게 도착한 셈이다. 그러나 60년이라면, 역사적 맥락에서 원작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는 데 필요한 비판적 거리가 적당히 확보된 시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성민(슬기와 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책 속에서

‘디자이닝 프로그램스’는 배열을 위해 규칙을 창안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디자이너는 화학 반응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공식을 참조하고 일군의 새로운 조합을 찾고자 애써야 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공식이다. 공식은 형태를 창출한다.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2쪽

내가 아는 가장 적절한 방법론은 프리츠 츠비키Fritz Zwicky가 개발한 형태론적 방법론인데, 디자이너가 아니라 과학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임에도 디자이너에게 유용하다.

9쪽

코르뷔지에의 모뒬로르는 그리드로 쓰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모뒬로르에 대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뒬로르란 나쁜 것이 일어나는 걸 어렵게 만들고 좋은 것을 쉽게 만드는 비율의 척도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디자이닝 프로그램스』의 목표로 추구하는 프로그램적 진술이라 하겠다.

12쪽

처음에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오늘날 사랑받는 모든 산세리프 활자체 가운데, 우리는 어떤 활자체를 선호하는가? 그렇다면, 오늘날과 미래의 타이포그래피를 위한 활자체에는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할까?

19쪽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의 기준은 수명을 다했다. 오늘날 타이포그래퍼들은 산세리프체와 로만체를 모두 활용하며, 책의 본문 활자 정렬은 대칭과 비대칭으로, 왼끝 맞추기와 오른끝 흘리기, 양끝 맞추기를 모두 쓴다. 이제 스타일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며, 이것은 최신성을 유지한다는 관점에서 이뤄진다. 독일의 어느 속담에서처럼, “열고 들어가면 되는 문만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우리가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살피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36쪽

과연 브랜드 로고가 브랜드를 나타내는 표식과 같은 성격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가변적인 성격을 띨 수 있을까? 거꾸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브랜드 로고의 일반적 특성은 무엇인가? 비례인가 ‘형태configuration’인가? 나의 답변은 한결같다. 이 질문은 그저 비례에 관한 것만이 아니며, 비례에 관한 질문일 수도 없다. 비례는 디자인 과업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것일 수밖에( 혹은 그 반대) 없다. 하지만 모든 기호는 얼마나 많은 형태가 존재하는지와는 별개로 보기가 될 만한 전형을 설정해야 한다. 가변성 때문에 ‘형태’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

48쪽

이미지를 만드는 일은 디자인과 창조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존재한다. 작업의 영역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시각적 영역, 더 정확히는 시각이라는 감각이다. 요소는 색상으로 정의된다. 이를 구현하는 수단은 비율로 정의된다. 따라서 이를 위한 기술은 다음과 같다. 색상을 결합하고, 비례를 정하며, 이 둘을 연결하고 통합하는 일이다.

55쪽

이미지의 기능을 설계하고 관람자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디자인의 간접적인 일부분이다. 이제 직접적인 부분에 대한 몇 가지 생각과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색상과 비율을 다루는 것, 규칙을 정하는 일 말이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바탕으로 진행한다. 비율이나 색상 값에는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비율과 색상 모두 값이 동일한 매체로 가정한다. 조화나 불일치는 구조의 문제다. 바꿔 말하면 이는 비율과 비율의 조합, 비율과 색상의 조합, 색상과 색상의 조합에 관한 문제다.

68쪽

움직임이란 자연적 질서를 교란하는 것. 연쇄의 균형을 무너뜨리거나 새로운 균형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원래의 구조보다 더 복잡할 수 있다.) 움직임을 도입하는 것은 곧 활동을 촉발하고 긴장을 형성하는 일. 요소의 위치를 변경하는 것은 요소 간 관계에 새로운 비중을 두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부여함을 의미한다.

76쪽

‘디자이닝 프로그램스’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KG는 대개 다양한 순열permutation을 토대로 선택해 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디자인했으며, 항상 이러한 프로그램이 최대한의 일관성을 보장할 것이라는 확신을 품었다.

100쪽

차례

프로–프로그래마틱_파울 그레딩거
문제에 대한 해결책 대신 해결책을 위한 프로그램

활자체로서의 프로그램
 새로운 토대에 선 옛 악치덴츠 그로테스크
타이포그래피로서의 프로그램
 통합적 타이포그래피
이미지로서의 프로그램
 오늘날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방법론으로서의 프로그램
 구조와 움직임

더하는 글

카를 게르스트너

카를 게르스트너(1930–2017, 스위스 바젤)는 다방면에 걸친 교육을 받고 비판적 사유를 펼친 인물로,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 디자인 분야를 혁신하며 1950년 이후 스위스 대표 디자이너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는 디자이너 이상의 존재였다. 예술가로서 체계적인 색채와 형태 언어를 구축했고, 1950년대 중반에는 그래픽, 타이포그래피, 예술에 관한 책을 낸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광고 에이전시 디렉터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49년 그래픽 스튜디오를 설립했고, 스위스 화학기업 시바-가이기Ciba-Geigy의 의뢰로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막스 슈미트와 함께 ‘가이기 스타일’을 창안했고, 이 과정에서 마르쿠스 쿠터를 만나 1959년 게르스트너 + 쿠터 광고 에이전시를 세웠다. 파울 그레딩거가 합류하면서 1963년에는 전설적인 광고 에이전시 GGK가 탄생했다. 1970년대 GGK는 스위스에서 가장 성공적인 광고 에이전시로 자리 잡았고, 유럽 각국과 미국에 지사를 열었다. 그는 스위스에어Swissair, 부르다Burda, 랑겐샤이트Langenscheidt 등 여러 기업 아이덴티티를 디자인했고, IBM의 전 세계 총괄 아이덴티티 컨설턴트이자 디자이너로 일했다.
게르스트너는 디자이너이자 에이전시 대표로 일하면서 동시에 미술 작업도 이어갔다. “커리어 초기에 광고 제작을 핑계 삼아 어디든 예술 활동을 해나갔다. 나는 뒤렌마트Friedrich Dürrenmatt가 문학 작품을 스릴러 소설로 위장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미술관에 억지로 밀어 넣지 않는 일상의 예술을 했고, 거기에는 진실을 전하겠다는 사명감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그 어떤 작업이든 나의 잠재능력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가장 의미 없이 낭비하는 일이라 여겼던 탓이다.” 전 세계에서 출간된 수많은 디자인 관련 출판물이 카를 게르스트너의 작업을 기렸고, 그의 작품은 많은 미술관에서 전시된 바 있다.
『디자이닝 프로그램스』는 그의 지식을 집대성한 책으로 그래픽 디자인계에서 추종자를 만들어냈고 『문해자를 위한 개론: 글쓰기의 시스템Kompendium für Alphabeten: Systematik der Schrift』(1972) 역시 꾸준히 읽혔다. 1973년, 뉴욕 현대미술관은 게르스트너의 작업 방식과 디자인 철학을 다룬 전시 ‹Designing Programs/Programming Designs›를 통해 그의 작업에 경의를 표했다. 뉴욕 아트디렉터스클럽은 게르스트너를 ‘명예의전당’ 후보로 추천했고, 1992년에는 독일 아트디렉터스클럽이 그를 명예회원으로 추대하였다. 2006년에는 시대를 개척한 게르스트너의 디자인과 예술 작업 아카이브 일체가 스위스 국립도서관의 판화 및 드로잉 부문 소장품으로 편입되었다. 2019년, 일본 긴자그래픽갤러리(ggg)에서는 스위스 국립도서관, 취리히 디자인박물관, 카를 게르스트너 유족 등의 도움으로 ‹What’s Karl Gerstner? Thinking in Motion› 기획 전시가 열렸다.

박재용

주로 한국 서울에서 활동하는 필자, 통·번역가, 큐레이터다. 장서광으로, 동시대 미술과 이론 서가인 ‘서울리딩룸’(@seoulreadingroom)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리서치 밴드 NHRB(@nhrb.space)에서 허영균과 함께 프론트맨으로 활동하고, 정성은, 김수지와 함께 스탠드업 코미디 모임인 ‘서촌코미디클럽’(@westvilalgecomedyclub)을 운영한다. 『마지막 혁명은 없다: 1980년 이후, 그 정치적 상상력의 예술』(현실문화연구, 2012), 『동시대-미술-비즈니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부산현대미술관, 2021), 『현대미술, 이렇게 이해하면 되나요?』(부커스, 2022)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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