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실천 그리고 되돌아보기
건축은 오랫동안 종합 예술과 학문으로서 지위를 인정 받아왔다. 사회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여러 인접 분야와 끊임없이 교섭하면서 ‘종합’의 지위와 성격을 이뤄왔다. 그렇기에 건축은 여러 분야와의 경계 속에서 규정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이 시대 건축은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가? 건축의 경계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책은 네 가지 형식으로 2018년 젊은건축가상 수상자를 다루고 있다. 먼저 아홉 장의 사진으로 압축되는 ‘에세이’는 건축가의 사유와 주제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나 인물, 현상, 작품 등을 보여주면서 자기 주제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어지는 ‘작품 소개’에서는 앞서 에세이에서 기술된 그들의 사유와 고민이 현실에서 실천되는 구체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비평’은 그들의 사고와 실천이 지금 우리의 도시와 사회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인지 비판적 관점으로 다시 살피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젊은 건축가들을 세계에 소개하고 그들이 더 넓은 시야로 활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영문요약’을 함께 실었다.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 – 김이홍
손으로 그리고 손으로 만들면서 건축을 익혀온 김이홍은 일면 건축의 전통적인 가치를 계승하는 젊은 보수처럼 보인다. 다양한 연장으로 가득 찬 목공실 풍경으로 시작되는 그의 에세이는 머리가 아닌 손으로 만들어가는 실체로서의 건축을 웅변하는 듯 보인다. 이 같은 관점은 그가 감명 받은 스티븐 홀의 방대한 스케치와 서도호의 노동집약적 작품 이야기로 이어진다. 건축은 결국 만들기의 대상이라는 것이고, 머릿속 관념을 넘어 물성과 공간적 실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을 대변하는 주요 작품들은 하나같이 분명한 공간적 경험과 물성을 갖고 있다. 오르는 과정 속에서 건물을 가로지르며 서로 다른 풍경과 공간 경험을 제공하는 DAN, 아모레퍼시픽 신용산 사옥 공사현장에서 공간적 반전을 끼어 넣은 ‘진짜와 가짜 사이’ 등. 다섯 가지 타입의 벽돌을 섬세하게 조합하여 협소한 파사드에 새로운 표정과 입체감을 준 57 E130 NY 콘도미니엄과 타일을 두 가지 모듈로 잘라 쓴 DAN에서는 김이홍의 재료적 실험과 목공 작업 같은 섬세함이 느껴진다.
비평을 맡은 존 홍은 김이홍의 건축을 ‘허구와 실재’라는 프레임으로 분석하며 집요하게 파고든다. 김이홍의 건축에서 허구와 실재는 어떻게 구분되는지, 혹은 이 둘 사이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추적한다.
인공지능 vs 건축가 – 문주호, 임지환, 조성현
경계없는작업실의 문주호, 임지환, 조성현은 사무소 이름에서부터 경계의 넘나듦을 선언하고 있다. 이들은 건축가의 전통적인 직능에 창조적 의심을 품고 새로운 건축가의 상을 제시한다. 특히 건물을 짓는 단순한 구축 행위를 넘어서 사람들이 좀 더 편리하게 정보를 공유하고 이 정보를 통해 좀 더 쉽게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경계없는작업실은 도시와 건축에 관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인공지능과 결합해 설계자동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하지만 이는 건축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의 본질에 대해 계속 질문하고 고민하는 과정이다. 건축에서 어디까지가 도구로서 기술의 역할이고, 어디서부터가 창작의 영역인지 탐구하는 중이다. 에세이를 살펴보면 아직 결론을 얻지 못한 그들의 고민과 탐구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이들의 대표작은 설계자동화 프로그램이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건축가의 직능을 부정하지 않는다. 후암동 복합주거와 논현동 코너하우스에서는 소규모 건축 행위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전략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본의 논리를 배격하지 않으면서도 도시와 건축의 공동성을 추구하는 전략을 읽어갈 수 있다. 또한 그린램프라이브러리 독서실에서는 그들의 관심이 단순한 디자인을 넘어 공간 시스템 개발과 브랜딩까지 확장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이민아의 비평은 건축가를 향한 개인적인 애정과 전통적인 길을 걷고 있는 그의 행보를 비교해가며 솔직하고도 진솔한 생각과 감정을 기술하고 있다. 글 속에는 그들 셋을 향한 진심어린 걱정과 염려,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가 선배이자 동시대 건축가로서 함께 녹아 있다.
벽돌에서 피어나는 풀 한 포기 – 남정민
마지막으로 남정민은 도시와 건축의 세부 요소를 섬세한 시각으로 관찰하고 있다. 그는 공간과 형태, 조형을 이야기하기보다 벽돌 한 장, 보도블록 하나의 틈새에서 피어난 도시 속 자연의 미시 생태계를 포착한다. 그 속에서 건축가 없는 자연발생적인 조경과 패턴을 발견하고, 이를 그의 작업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그의 에세이는 한 가지 밀도 있는 주제를 연속해서 다룬다. 그가 고른 아홉 장의 사진들은 건축에서 자연과 표면의 문제를 모두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녹색의 컬러를 쫓다보면 결국 현대건축에서 조경과 자연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 긴 역사를 이해하게 된다.
남정민은 자연과 건축의 통합을 여러 층위에서 실험한다. 리빙 프로젝트는 작은 조경과 건축의 단위 재료를 결합한 것으로 벽돌, 블록, 마감재, 스트리트 퍼니처 등에 식생이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며 조합해 간 것이다. 일부는 그의 작품에 실제 적용된 것들이다. 작은 공원은 리빙브릭이 적용된 사례로 픽셀 같은 벽돌에 풀들이 자라며 삭막하고 척박한 다가구주택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리빙포켓은 꽃+유치원의 1층 외벽을 장식하며 어린이들이 벽에 꽃을 심는 상상 속의 행위를 건축으로 불러왔다. 그의 일련의 작업은 앞선 건축가들에 비해 가장 확실한 자기 주제와 일련의 실험들을 보여준다.
김현섭은 이런 남정민의 작업을 건축 표면의 문제로 정리하고 그 표면의 깊이와 그 깊이에 이식된 식생의 문제로 비평해 나간다. 근현대 서양건축사와 한국 현대건축사를 넘나들면서 우리가 표면에 대해 논의해온 바와 인식을 되짚고 더 큰 줄기의 흐름 속에서 남정민의 작업을 비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