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애〉 〈파이란〉 〈생활의 발견〉 〈오아시스〉 〈나쁜 남자〉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그리고 〈마리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참신하고 감각적인 이들 한국 영화(애니메이션)들의 포스터를 보고 있노라면 꼭 집어 말하기 힘들지만 어딘가 닮아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것은 아마 포스터의 이미지와 꼭 어울리는 글자들, 잔잔하면서도 눈길을 사로 잡는 타이틀 로고에서 기인한 듯하다.
『스위스 디자인 여행』은 이들 영화의 로고타입 디자인을 맡았던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박우혁이 스위스 바젤 디자인 대학교에서 2년간 머무르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것을 고스란히 옮겨 담은 책이다. 샤우라거와 비트라, 아트바젤을 비롯한 여러 스위스 디자인의 성지들과 아민 호프만, 에밀 루더의 타이포그라피 작품들,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스위스의 여권과 쓰레기 봉투, 네 가지 언어로 장식된 스위스의 화폐, 카니발을 맞아 거리를 가득 메운 빨간 십자가… ‘made in swiss’를 이루어낸 디자인의 힘이 과연 어디로부터 오는지 보여주는 다채로운 사진 자료들.
그리고 같은 듯 전혀 다른 바젤 디자인 대학교의 타이포그라피 강의와 바인가르트와의 만남, 서로 다른 나라에서 왔지만 같은 꿈을 꾸었던 친구들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하는 스위스 유학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 작가가 서문에 밝혔듯이 스위스에서 디자인을 공부했다고 하면 으레 묻기 마련인 멋진 풍경이나 높은 물가가 스위스에서의 삶을 전부 설명해주진 못한다. 작가가 경험한 스위스적인 것, 또는 ‘스위스 스타일’은 어느 일요일 아침 한적한 라인강가를 걷다가 다다른 팅걸리 미술관, 작은 시골역에서 마주한 요셉 뮐러 브로크만이 디자인한 스위드 철도의 사인 시스템, 손톱 크기의 반도 안 되는 작은 글자들과 하루 여덟 시간 동안 씨름 했던 바젤의 타이포그라피 수업 속에 있었다.
영화 포스터처럼 세련된 타이틀 로고와 노란색 위에 스위스의 푸른 하늘이 점점이 떠있는 책의 표지 역시 그 작품이다. 심플한 노란색의 표지를 열면 그 안쪽으로 스위스의 붉은 색과 십자가 무늬를 배경으로 스위스 지도가 그려져 있고 이제 작가가 직접 글로, 사진으로, 그리고 디자인으로 담아낸, 학교 앞 선술집의 시럽을 넣은 맥주처럼 달콤쌉싸름한 진짜 스위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의 로고 디자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를 ‘타이포그래퍼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정의하고 있는 박우혁은 자신의 개인 스튜디오, Type.Pa9e의 이름을 타이포그라피의 ‘Type’과 책의 구성 요소인 ‘Page’를 붙여 만들었을 정도로 책 만드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내용뿐 아니라 디자인적으로도 흥미로운 이 책에서 자신의 관심과 열정,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