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없는 당신에게
지금까지 한국 디자인은 서양 것을 따라 하거나 제도권 아래 있거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생겨난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시각적 기술만 어설프게 흉내 내고 그들의 사상과 이론은 깊이 알지 못한다. 한국 디자인에 사상과 이론, 즉 ‘말’이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한국 사회에 발 디디고 살아가는 우리가 유독 의문이 적고 말이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창조는 지속적으로 질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의문 안에서 새로운 생각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고전을 통해 우리의 말을 회복시켜주고, 로고스(logos) 즉 논리와 이성을 갖게 해주며, 회복된 말 속에서 주체적 질문을 꺼낼 원동력을 만들어준다.
아돌프 로스에서 김홍식까지
이 책에서 이르는 고전의 범주는 모던 디자인이 태동한 20세기의 텍스트, 그중에서도 이론과 사상을 지향하는 책들이다. ‘망치를 든 건축가’ 아돌프 로스의 『장식과 건축』에서 시작해 근대 동양의 탄생과 디자인 헤테로토피아를 거쳐 포스트모던 세계까지. 특히 마지막 한 권인 김홍식의 『민족건축론』은 이 책의 유일한 한국 텍스트로 고전과 현재 우리의 삶을 한층 가까이 연관시켜준다. 권말에는 야나기와 파파넥에 관한 담론을 보충하며 생각의 전환을 유도하고 현재까지 유효한 문제의식을 다시금 제시한다. 이렇게 지은이는 모던 디자인사를 넓게 펼치며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하고, 고전을 무조건적인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공감과 재생의 재료로 삼는다.
창조적 주체의 탄생
시대의 결을 거슬러 올라 의미 있는 텍스트를 찾아내고 그로 인해 깊어진 새로운 눈으로 세상과 디자인을 보는 것에서 창조성이 태어난다. 역사 속의 말과 내 안의 말이 만나 창조적 언어, ‘나’의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고전이라는 깊은 우물에서 그 새로운 시각과 가치관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책은 주체적 창조에서 인문학적 소양의 중요성을 아는 디자이너뿐 아니라, 학문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고전을 읽고 싶지만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아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거나 창조적 사고의 근원을 찾는 일반 독자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